• 주간한국 : [DJ.YS 애증의 30년] 그 끝은 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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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05.26 18:09:00


  • 어디까지 갈 것인가?

    작년 12월말부터 시작된 김영삼 전대통령의 김대중대통령및 현정권에 대한 비난이 점점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지난 5월17일에는 서울 수유동 4·19국립묘지를 참배한 뒤 성명까지 발표, 현정권이 박정희 전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데 대해 “독재자(김대중대통령)가 독재자(박정희 전대통령)를 미화하는 가소로운 일”이라며 “(현재의) 사회·정치적 상황이 4·19때와 똑같다”고 언성을 높였다.

    DJ를 때려대는 YS의 일련의 행태는 개인적인 분노의 표출인 동시에 내년 총선을 앞두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경남에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따라서 6월3일부터 15일까지로 예정돼 있는 일본 방문중에 YS가 다시 어떤 ‘돌출발언’을 할 지에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관심’을 갖고 예의주시하고 있다.

    YS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리고 다시, 이런 사태가 정치권의 세력변화에는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지만 DJ와 YS 두 사람의 관계사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





    70년대 이후 한국정치의 양대산맥

    DJ와 YS.

    두 사람의 관계는 한마디로 ‘애증의 30년’이다.

    YS와 DJ는 평생 경쟁자이며 협력자였고 파트너이자 라이벌이었다. 둘은 70년대부터 ‘상도동’과 ‘동교동’이라는 한국 정치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면서 정상에 오르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싸움은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투쟁이자 민주화운동이기도 했다. 시대의 어둠이 깊어질 때, 공동의 적이 강할 때 둘은 뭉쳤다. 그러다 정상이 코 앞에 보이는 듯 하면 다시 갈라서서 대결을 벌였다.

    이들의 포옹과 반목, 악수와 결별, 밀어주기와 밀쳐내기는 결국 우리 시대를 만들어낸 드라마였다. 드라마의 두 주인공은 다른 한 김씨 조연과 도매금으로 “이제 가서 낚시나 하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정상에 올라서고야 말았다. 한 사람이 5년 먼저.

    두 사람의 역사적인 만남은 68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YS와 DJ는 야당인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 나란히 출마했다. 유진오총재는 이미 세 차례나 원내총무를 지낸 YS 대신 DJ를 지명했으나 의원 투표 결과 DJ의 패배였다. 첫 만남은 이렇게 대결로 시작됐다.

    두 사람의 본격승부는 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을 막지 못하고 ‘집권불망(不望)’의 좌절에 빠진 야당의 탈출구로 YS는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왔다. 이에 DJ와 이철승이 가세해 3파전을 벌였다. 1차 투표에서 YS가 이겼지만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다. 바로 2차 투표가 실시됐다. DJ는 이철승 진영의 도움으로 YS를 제치고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했다.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이다.

    DJ는 71년 대선전에서 파격적인 공약과 특유의 달변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숙적 박정희대통령에게 95만표(46%) 차로 석패했다. 부정선거만 아니었다면 당선됐을 것이라는 게 당시 국내외의 관측이었다.





    정상앞에 서면 ‘밀어내야 할 적’

    72년 1인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시대는 암흑으로 접어든다. 두 사람은 숙명적으로 손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후 YS는 선명 야당의 가시밭길을 걸었고 DJ는 투옥, 납치 등의 고난을 겪으면서 장외 민주투사의 상징이 됐다. 공조의 대표적인 경우가 박 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된 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였다. 당시 가택연금중이던 DJ는 정권의 방해공작으로 어려움을 겪던 YS의 당권 장악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그러나 79년 10·26으로 박대통령이 살해되고 ‘서울의 봄’이 오면서 둘은 다시 경쟁관계가 된다. 출마만 하면 대통령 당선은 문제가 아닐 것 같았다. 군부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의식하기에는 성큼 다가서줄 것 같은 미래에의 기대가 너무 컸다. 그러나 역사는 두 사람의 낭만적인 희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5·17 계엄 전국확대를 시작으로 야심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이 난데없이 역사에 끼어든 세력에 의해 둘은 어둠의 동지로 묶인다.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DJ는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YS는 정계은퇴를 강요받으며 가택연금된다.

    ‘박통’보다 더 무시무시한 공동의 적이 생긴 것이다. 사실 이 적들은 이후 80년대 내내, 그리고 90년대 초반까지 두 사람을 이런저런 올가미로 얽어넣는다.

    DJ가 82년말 신군부의 압력으로 미국 망명길에 오르는 사이 YS는 거듭된 가택연금에 시달렸다. DJ가 미국에서 귀국의 꿈을 꾸며 반독재투쟁에 열중하는 사이 YS는 특유의 결단으로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한다. 83년 5월 18일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며 무기한의 단식투쟁에 나선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6월 9일 23일만에 단식은 중단됐다. 당시 이 소식은 신문에 단신으로 취급됐지만 입에서 입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독재에 의해 강요된 침묵에 대한 가장 강렬한 저항으로 평가됐다.





    직선제, 양보 못하고 둘다 참패

    마침내 두 사람은 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반독재 투쟁에 다시 힘을 모은다. 미국 망명 시절 DJ가 국내의 YS와 손잡고 결성한 것이 민추협이다. 민추협은 85년 2·12총선에서 신당인 신민당이 압승하는 데 원동력 역할을 했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민주화운동을 추진, 87년 6월항쟁을 촉발시켰고 6·29선언으로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직선제 개헌으로 야당의 집권가능성에 햇살이 비치자 두 사람은 다시 라이벌로 돌아선다. 87년 13대 대선에서 두 사람은 여당(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를 꺾기 위해서는 후보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여론의 압력을 받지만 끝내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DJ는 평민당을 창당해 YS와 결별하고 두 사람은 나란히 출마한다. 결과는 둘 다의 참배였다.

    그러나 88년 4·26총선에서 재기한 두 사람은 제1야당과 제2야당의 총재로 여소야대 정국을 주도하며 협력한다. 그러나 2년이 채못가 또 다시 결별한다.

    YS가 노태우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여당 대표로 변신한 것이다. DJ는 그 사이 야당의 길을 고수했다.

    마지막 승부의 날은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92년 12월 14대 대선.

    DJ는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YS는 여당인 민자당 후보로 한판 진검승부를 펼친다. YS는 이 대회전에서 대통령이 됐고 패한 DJ는 눈물을 머금고 정계를 은퇴한다. 두 사람의 애증관계는 이제 막을 내린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막을 올린 사람은 DJ였다.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정치 일선에 복귀한 것이다. 그는 95년 6·27 지방자치선거 지원유세에 참여, 조순을 서울시장에 당선시키며 파란을 일으킨 데 이어 9월에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전직·현직대통령으로 ‘또 다른 경쟁’

    YS는 여당 총재이자 대통령으로, DJ는 야당 총수로 정면 대결이 재개된 것이다. 그 자리에는 또 다른 김씨(JP)가 DJ의 손을 잡고 있었다.

    IMF(국제통화기금) 위기로 YS가 대통령 자리에서 사실상 내려온지 어언 1년반. 한 사람은 현직으로, 한 사람은 전직으로 둘 사이는 맞대결이 어울리지 않는 관계로 바뀌었다.

    그러나 YS는 다시 그 특유의 결단으로 떨쳐 일어섰다. 그 모든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YS는 ‘독설’ 하나로 DJ에 대한 포격을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될까? 앞으로의 정국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은퇴한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의 다툼이 어떻게 전개될 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애증과 갈등 표현은 어떤 식으로든 끊임없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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