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인간탐구] "피카소도 베토벤도 나만큼은 벌레 못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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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05.19 14:47:00




  • ‘집이 너무 엉망이라서… 진짜 엉망이라서…’ 팔순을 바라보는 곤충학자 이승모(75)씨는 낯선 객에게 집 보여주기를 너무도 쑥스러워했다. 만나러 가기전 같은 말만 열댓번을 들었다. 그저 예의차원이겠거니 했는데, 알고보니 그것은 참으로 정직한 진술이었다. 올망졸망한 서울 길음동 산동네 꼭대기에서 찾은 그의 집은 몹시 좁고 어수선했다. 꼭 한시간쯤전에 이삿짐을 막 풀어놓은 것처럼 현관부터 거실, 방 곳곳에 빽빽히 들어 찬 액자와 상자들. 약 2만여점의 곤충 표본이 들어있었다. 달랑 방 두 개 뿐인 집에 큰 방 하나도 곤충에게 내주고 주인인 두식구는 그 어수선한 곤충의 밀림 사이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책도 보는 모양이었다. 이럴때 가장 질색을 할 만한 사람은 으레 안주인이겠지만 부인 박월서(63)씨는 오히려 한 술 더 뜬다. “선생님(남편 이씨)이 좋아하는 일이면 저도 뭐든 좋아요. 또 곤충들이 얼마나 예쁘고 신기한데요.”





    국내 곤충학회 최고 권위자

    이승모씨는 국내 곤충학계 최고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원로급 곤충학자다. 국립중앙과학관 개관멤버로 꼬박 20여년을 근무하다가 94년에 퇴직. 그것도 공식상 정년인 65세를 채우고도 마땅한 후임자가 없다는 이유로 5년이나 더 붙들려 있다가 나온 뒤 ‘장외’에서 뛰는 중이다. 그도 그럴것이 곤충에 관한 한 그만한 인물이 드물다. 그의 연구물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나비와 잠자리, 갑충류 등. 70년대초 번개오색나비를 학계에 보고한 것을 비롯, 80년대초 석물결나비, 조흰뱀눈나비 등 우리에겐 이름조차 생판 낯선 희귀종들을 국내 최초로 발견, 보고하는 등 거의 해마다 한건씩 ‘특종’을 터뜨렸던 주인공이다. 70년대엔 정부에서 주는 훈장도 하나 받았고, 퇴직한 요즘에도 현재 한국곤충학회 명예이사, 한국나비학회 고문, 국립식물검역소 곤충담당 자문위원, 제주자연사박물관 곤충담당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듯 평생을 벌레에 투자한 곤충박사라고 해서 그에게 담박 왜 곤충이 좋냐고 묻는건 확실히 우문이다. 물어봐야 누구든 다음과 같은 대답 이상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디 바퀴벌레 싫어하는 사람은 이유가 있어서 싫은건가요? 그냥 싫은거지. 저도 딱 그래요. 곤충은 그 생긴 것도 묘하고, 살아가는 모양도 우리보다 더 묘하고… 어려서부터 곤충이 좋았습니다. 전 음악과 그림도 좋아하지만 진작에 음악공부를 했대도 베토벤만큼은 못 됐을겁니다. 그림을 그렸대도 피카소가 되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림엔 천재인 피카소도 그더러 벌레를 잡으라면 저만큼은 못할 걸요. 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 같습니다.”





    부인도 곤충채집 50년 함께한 ‘비공인 박사’

    퇴직해서 좋은 건 채집 다닐 시간이 더 넉넉해졌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며칠 연구소에 나가보는 일 외엔 수시로 전국의 산이며 들로 곤충채집을 다닌다. 채집때엔 대개 부인과 동반한다. 부인 박씨도 남편과 곤충채집 50여년을 함께 한 비공인 박사. 때로는 이씨가 오히려 자문을 구할 정도로 해박한 지식이 쌓였다. 장비는 큰 포충망 하나에 고작해야 살충제와 유리병 하나. 그 큰 포충망을 들고 돌아다니다 보면 가는 곳마다 동네 아이들이 신기하다며 줄줄이 뒤를 쫓기도 하고, 채집때는 부부간에 누가 더 많이 잡나 내기도 벌인다. 운이 좋을땐 한 번에 200-300마리도 잡아오고 안될 땐 며칠을 헤매고도 빈 손이다. 언젠가 어렵사리 백두산까지 갔을때도 며칠 내내 비가 내려 발을 굴렀다. 온 신경이 벌레 찾는데만 몰리다보니 실수로 다치기도 일쑤. 70년대 언젠가 설악산에서 번개오색나비를 잡을 때도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 아찔하게 구출된 경험이 있고, 그렇게 조심하고도 박씨는 이미 한 차례 사고로 다리를 다쳐 수술까지 받았다. 또 이씨는 재작년 설악산에서 넘어진 뒤 아직도 한쪽 다리가 다소 불편한 상태다. 젊었을때 같으면 단 며칠만 지나도 거뜬히 회복했겠지만 그의 나이 벌써 팔순 가까운 고령. 의사의 권고대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만 그 핑계로라도 좀 쉬어도 될 일을 그는 굳이 지팡이까지 끌고 다니며 채집을 강행하고 있다.

    지난주에도 수원의 저수지 서호에 다녀왔다. 요즘 그가 몰두하는 주제는 잠자리의 멸종실태. 그의 세 번째 도감이 될 잠자리도감도 준비중인데다 점점 사라져가는 국내 잠자리 멸종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꾸미는 중이다. 그런데 몇해전만해도 남아있던 봄잠자리가 올핸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환경파괴 문제가 심상치 않다. 벌써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른 것이다. 본격적인 곤충얘기로 화제만 돌아가면 그의 인상이 금새 구겨진다.

    “잠자리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수원에서도 환경을 살려보겠다고 콘크리트로 보완공사를 하고 있지만, 별 도움이 안 될 얘기입니다. 콘크리트 역시 환경을 파괴하거든요. 양어장은 될 지 몰라도 자연회복은 이제 어렵다고 봅니다. 환경문제에서 저는 ‘절대’를 주장하는건 아닙니다. 어차피 개발 때문에 자연훼손이 불가피하다면 다만 100년쯤에 망가질 자연이라도 최소한 300년까진 더 버틸수 있도록 애써보자는 겁니다. 그럴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좀 더 의식을 가지고 서로 의논해가며 문제를 풀어나가면 될텐데, 실제론 앞에서만 아는 척하지 돌아서면 당장 마을 도로 내는데만 급급한 국회의원도 많이 봤습니다. 그냥 인사로 한 얘긴데 순진한 우리가 속은거죠. 그럴 때 제일 섭섭합니다. 차라리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말이나 해주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을텐데…”





    김일성대학 생물학부 수석 졸업한 수재

    그는 북한 출신의 곤충학자다. 스스로도 ‘기구한 팔자’라고 부르는, 애닯은 실향민이다. 고향은 평양. 양조장과 정미소를 경영하는,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본인은 함구하고 있지만, 한국전쟁으로 월남하기 전까지 평양고보를 졸업, 김일성대학 생물학부를 수석졸업한 수재였으며, 그의 부친 역시 김일성대학 식물학부 부장을 지낸 이성현박사라는 사실도 항간에 알려진 사실.

    소위 북한의 KS마크였던 그가 남한에 홀로 던져진 것은 순전히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당시 국내에선 유일한 대학이던 서울대에서 공부할 생각으로 수시로 남북을 오가며 입학절차를 알아보던 중 전쟁이 터졌고, 귀향의 기대도 헛되이 곧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영낙없이 이 땅에 남게 됐다. 당시 나이 27세, 가진거라곤 주머니에 든 곤충 몇마리 뿐이었다.

    처음엔 군에라도 입대하면 북쪽으로 올라가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했지만 나이도 많은데다 신원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후 목포, 부산, 제주도 등지를 떠돌며 외롭고 험난한 생활을 했다.

    “말못할 고생을 했지요. 거의 거지꼴로 살았습니다. 밥은 거의 굶고 다녔고 잠은 아무 집이나 들어가 좀 재워달라고 해서 자기도 하고, 제가 영어를 조금 하니까 미군부대에 가서 통역같은걸 해주고 팬케 을 한장 얻어먹는데 하도 오래 굶다가 먹으니까 먹자마자 설사가 나더라구요.”

    한번은 동래 피난민 수용소에 있던 중 세무공무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응시,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그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탈락되고 말았다. 합격자에게 요구하는 신원보증, 재정보증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월남민들처럼 국제시장에서 장사도 해봤지만 그것도 실패, 나중엔 미군부대의 군수물자를 나르는 하역부 생활을 했다. 그러나 몸집도 작은데다 고된 중노동에 사흘이 멀다하고 앓아눕던 차에 우연히 그의 영어실력이 눈에 띄어 하역부 대신 그들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68년 국립중앙과학관에 취직, 본격 채집활동

    68년은 여러모로 운이 좋은 해였다. 국내 최초로 국립중앙과학관이 세워지면서 해당 경력자를 찾고 있었고, 때마침 박정희대통령은 ‘신원특이자 구제’라는 제도를 처음 시행하면서 그때까지 신원보증의 덫에 걸려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북한 출신의 고급 인력을 대거 회생시켰다. 대신 중앙정보부가 이들의 신원을 보증, 관리하는 셈이었다.

    신원특이자 제도의 도움으로 간신히 취직, 그때부터 곤충과의 본격적인 동거가 시작됐다. 처음이자 유일한 직장이었던 과학관 근무 20여년 동안 그는 ‘일벌레’였다. 회의차 나가는 외지출장에도 꼭 채집망을 챙겼고, 동료들이 저녁 술자리에 나간 사이 혼자 플래시를 들고다니며 주변을 뒤지며 곤충을 잡고 다녔다. 주말이면 부부가 채집을 떠나는 것은 기본, 휴가는 모아뒀다 동남아 등지로 원정채집을 다니는데 썼다. 얼마 안되는 공무원 박봉도 그런 여행경비로 다 바닥이 났다. 나중에 나비며 하늘소 표본으로 도감을 낼 때도 꼼짝없이 외상까지 져야했다. 그렇듯 일을 위해 철저하게 살아온 그의 자기관리론이 있다.

    “요즘 못 사는 사람들중엔 체제까지 부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기관리를 제대로 못한 사람들입니다. 자기관리만 철저하다면 누구든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 수 있는 겁니다. 저도 한 푼 없이 시작했습니다. 고생이라고 치면 누구못지 않게 고생했습니다. 수십년 사는 동안 집 한칸 없이 셋방만 전전하며 다녔고, 지금 이 집도 당시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라 워낙 싸서 겨우 마련한 겁니다. 가진 재산도 없고, 사는 형편도 늘 여전하지만 그래도 늘그막에 내 하고 싶은대로 일 하고 살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사는 이대로 족합니다. 주어진 여건속에서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게 최선인거지요. 더 바랄 게 뭐가 있습니까.”





    자연사박물관 건립이 생전의 마지막 꿈

    팝송과 재즈를 즐겨듣고 샤갈과 피카소 그림도 좋아하는 70대 노인. 아직도 북한 사투리가 점점이 박혀있는 그의 말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듣다가 놓치는 단어가 태반이다. 피난시절, 이젠 이 땅에 마음 잡고 정착해서 살아야겠다며 고향생각을 완전히 접었던 그도 이젠 마음이 바뀐다고 했다. 죽기전에 한 번 고향에 가보고 싶어진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게 바로 그런 것일까. 그보다 앞서 할일이 또 있다. 그의 집에 수십년째 ‘장기투숙’중인 벌레들을 하루빨리 분가시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이 곤충들을 전시할 자연사박물관 건립을 추진해왔고, 도와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IMF 때문에 모든 얘기가 쑥 들어갔다. 적절한 시설만 있으면 그 누가 됐든 돈 한푼 받지 않고 몽땅 무료로 기증할 생각이지만, 아직 임자가 없다. 그간에 모은 곤충은 고사하고 지금도 하루하루 불어나는 이 벌레식구들을 언제까지 ‘무전취식’시켜야 할 지 요즘은 그 걱정이 제일 크다.



    정영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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