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인간탐구] 그의 연주는 영혼을 넘나드는 바람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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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05.25 18:52:00




  • 지난 4월 10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보다 한 발 앞서 안동을 ‘뒤집고’간 남자가 있다. 무대는 안동시 임동면 안동댐 수몰지 내의 낡은 고택. 머리를 빡빡깎은 이 ‘수상쩍은’ 남자는 50여명의 예술인을 대동하고 나타나 한바탕 요란한 ‘쇼’를 벌였다. 쏟아지는 빗발에도 아랑곳없이 빗속에서, 트럭에서, 마루에서, 진흙탕에서 맘껏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림도 그렸다. 삽시간에 몰려든 구경꾼만 천여명.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동네의 한 노인은 “70평생 저 집에 저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건 처음 본다”며 “저 집이 그렇게 대단한 집이었냐?”고 되려 객지사람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러기를 몇시간, 그중에서도 그 수상한 남자가 치는 빗 속의 피아노 소리는 기어이 구경꾼들을 흔들어 놓고 말았다. 박수와 한호로 열광하는 것도 모자라 관객들은 숫제 병신춤까지 추며 화답했다. 공연이 끝나자 집으로 돌아가던 몇명의 여성은 ‘그 남자가 전생에 귀신이었던 게 틀림없다’는데 만장일치를 보았고, 한 남자는 공연 며칠후 ‘4월10일 안동공연에 부침’이라는 제하의 장편시까지 지어 인편으로 전달해왔다. 천여명이나 되는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았던 그 사람. 바로 ‘컬트 피아니스트’ 임동창(43)이었다.

    장르 초월한 거침없는 연주, 넋 빼앗기는 관중들

    남들은 평생 한가지 이름도 달기 어려운 마당에 그는 겨우 나이 마흔 셋에 너무 많은 이름을 붙이고 산다. 컬트 피아니스트, 현대음악가, 명상음악가, 행위예술가, 괴짜 음악인, 기인 등. 그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불리는 건 역시 ‘괴짜’쪽이다. 95년 SBS ‘송지나의 취재파일’에 처음 소개되면서 방송가에선 특히 인기있는 귀빈이기도 하다. 독학으로 피아노에 입문, 한때는 스님이었고 공연이면 공연때마다 예측불허의 기행을 벌이는 이상한 피아니스트, 그러나 감동적인 피아노 연주가로 소문 났으니 그럴만도 하다.

    실제로 음악적 기행에 관한 한 단연 선두다. 그가 벌인 몇가지 ‘컬트적인’사례들.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라 피아노를 마디마디 분해한다. 연주도중 탁구공이나 물방울을 건반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때론 청계천 벼룩시장을 뒤져 산 놋그릇 300개로 악기를 삼는다. 연적으로 벼루에 물을 따르거나, 풀 먹인 창호지에 쓱쓱 붓질을 한 뒤 대뜸 그 붓을 휙 던진 다음 한숨을 푹 내 쉬더니 이 모든 소리를 녹음해 명상음악이라며 들려주기도 한다.

    가리는 장르도 없다. 현대음악은 기본, 국악에다 연극과 무용, 종교, 동요, 영화판 등 어느 분야든 거칠 것없이 헤집고 다닌다. 95년 김덕수 사물놀이 패와의 공연을 비롯해 극단 무천의 연극 ‘메디아’, 영화 ‘유리’, 무용 ‘빗소리’ 등 수많은 타 장르 공연에 참여했고, 96년엔 세계 최초의 구도음악인 ‘수행음악회’란 것도 열었다. 또 97년 대금의 명인 이생강씨와의 협연을 위시해 사물이면 사물, 아쟁이면 아쟁, 특히 국악은 그가 지대한 관심을 가진분야. 음반도 여러장 냈지만, 그것마저 제각각이다. 현대음악 연주음반은 물론, 전래동요음반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와 ‘얼 다스름’ ‘이 뭐꼬?’라는 명상음반 등 그야말로 전방위. 독일과 미국, 덴마크 등 해외공연도 수차례 벌였다. 그중 괴짜는 괴짜끼리 통하는지 웨일즈 태생의 ‘학교가 포기한’ 문제아 출신 음악가 겸 조각가 스티브 헙백을 비롯, 헨릭 제퍼슨, 토니 브룩스 등 이름난 유럽 뮤지션들과 협연을 가졌다. 이달 5월엔 5·18 민주항쟁기념 록페스티벌에 등장, 국내 로커들과도 한 무대에 섰다. 이제 어디가 더 남아있을까?





    안동 수몰지 공연은 인생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쳬험

    그러나 이 괴짜라는 이름말고는 남들처럼 교수라느니 단장이라느니 하는 그럴듯한 직함이나 소속도 없다. 이를테면 그는 자신이 만든 곡을 상품삼아 공연도 하고, 연주도 하며 돈을 버는, 피아니스트중에선 예가 없는 ‘프리랜서 음악가’다. 굳이 소속을 찾자면 95년에 직접 만든 ‘쟁이골 사람들’의 대표정도? 언젠가 임동창식 쟁이학교를 만들겠다는 꿈으로 그가 세상에 내놓은 이름이다. 95년 방송에 알려진 것도 실은 이 쟁이골 사람들의 첫 여름캠프에서였고, 지난 4월 안동댐 수몰지의 공연도 바로 이 쟁이골 사람들의 이름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안동공연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틀어 그에겐 가장 인상깊은 체험이었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그 낯선 한옥에서 난데없이 공연을 열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우연히 길을 가던중 ‘귀신에 홀린 듯’해서. 그 낡은 집이 어찌나 아름답고 황홀한 예술작품으로 보이던지, 그 대가로 치른 ‘피 마르는’고생도 불사했다. 남들이 모르는 공연 이면의 이야기들. 당장 그 집을 발견한뒤, 공연을 허락받기 위해 집주인을 찾았으나 소유자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며칠간 갖은 고생 끝에 소유자를 알아냈지만 그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또한번 난항. 게다가 관객들이 들어서야 할 일대 논밭의 주인들은 아직 파종도 하지않은 허허벌판을 볼모로 터무니없이 높은 ‘관리비’를 부르고 나왔다. 또 워낙 외진 산촌에다 오래 내버려진 집이라 마실 물도, 아무것도 없는 터. 공연 때문에 얻은 빚 천만원은 차치하고도 한 달 내내 그 뒤치닥 거리로 몸살을 앓았다.

    “구구절절이 ‘똥 줄 타는’순간이었죠. 하나도 그냥 넘어간 일이 없어요. 그래도 결국 설득한 비결? 그건 절실함의 문제지요. 뭐든 진실하고 절실하면 통하게 돼있어요. 그때 공연을 함께 했던 사람들도 내가 처음 전화했을 때 단 한사람도 ‘껄쩍지근’하게 대답한 사람이 없었어요. 단번에 흔쾌히 달려든거지. 그때 공연하러 왔던 사람이 54명인데, 개런티고 지랄이고 어디있어, 차비도 지 돈 지가 들여서 온거고, 개런티 한푼없이 그냥 왔다갔는데. 그런데도 다들 너무 좋았다는 겁니다. 이제까지 살면서 이런 공연은 처음이라고, 공연을 하는 스스로가 자기 인생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만들더라는 겁니다. 공연자체도 감동적이었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참 부끄럽고 부족하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해요.” 그때 와 준 이들이 국악인 신영희, 가수 이동원, 조각가 박찬수, 행위예술가 강만홍 등 우리에겐 익히 알려진 각분야 정상급 예술가들이다.

    그렇게도 황홀한 공연이었다면, 그도 공연후 허탈감이나 공허감이란 게 있었을까? “공허감? 전 전혀 그런거 없어요. 그게 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지요. 어디에 휘말리지 않는다는거. 겉보기엔 신명나도, 언제나 중심은 덤덤합니다. 어떤 극치의 감동도, 그 뿌리는 결국 ‘고요’입니다. 단지 자신의 한부분만 몰입되면 공허를 느끼게 되지만, 나는 모든 게 한 덩어리로 움직이기 때문에 동요가 없는거지요. 물론 쉽게 이해가지 않을 얘기지만요.”





    인생 바꿔놓은 음악선생님의 피아노 소리

    즉흥연주를 가장 좋아하는 그는 그의 삶 역시 따지고보면 즉흥의 연속, 그 자체로 변주곡이다. 56년 군산에서 출생, 찢어지게 못 사는 집안의 5남매중 장남인 그는 중학교 2학년때 음악선생님의 ‘폴로네이즈’ 피아노 연주를 듣고 그만 ‘정신을 잃었다’. 마치 ‘신이 내리듯’ 피아노 소리에 빠졌다. 그날로 당장 선생님을 졸라 음악실 열쇠를 건네받은 뒤 피아노를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는 아예 이불을 갖다놓고 거기서 살았다. 선생님도 없고, 그저 악보만 들여다보며 혼자하는 공부였다. 연습량은 엄청났다. 하루 16시간을 꼬박 피아노에 앉아있었다. 그 사이 학교 피아노 2대를 망가뜨렸다. 어찌나 열심히 쳤던지 피아노 내부에 있는 햄머의 양털이 모두 빠져서 피아노 바닥에 수북히 쌓여있었다. 피아노를 고치러 왔던 수리공이 ‘세상에 이런 피아노는 처음 본다’고 혀를 둘렀을 정도.

    그렇게 1년동안 기본기를 닦은 뒤, ‘더 잘 하고 싶어서’ 스승을 찾아나섰다. 어렵사리 마련한 첫달치 레슨비 3,000원을 빼고는, 그가 워낙 가난해보였던지 피아노 선생은 그의 교습비까지 아예 면해주었다. 고1때는 학교 수업도 빼먹은채 피아노에 매달렸지만, 아무리 레슨을 받는다고 한들, 결국 스승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모든 게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한계로 인한 고통은 5년이나 계속되다가 몸과 마음이 완전 만신창이가 되고서야 어느 순간 넘어섰다. “뭐든 완전히 마지막까지 가서야 깨달음이 오는거죠. 그때도 거의 실신하다시피 지쳐서 그냥 피아노앞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제 손은 저대로 혼자 움직이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갑자기 그 소리가 달라져 있는거예요.”피아니스트 임동창의 ‘득음의 순간’이었다.





    고교졸업후 입산출가, 음악의 부름에 다시 속세로

    음악도 결국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인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음악도 더 잘 할 것 같았기에 고교졸업후엔 입산출가했다. 스님으로서 보림(寶林)이란 법명도 얻었다. 그러나 본인 마음에만 걸릴 것이 없으면 남 눈치 안보는 성미에다 엉뚱하고 고집이 센 것도 여전했다. 스님이 된 뒤엔 오히려 전에 안 먹던 고기까지 곧잘 입을 당겼고, 술도 많이 마셨다.

    결국 오래지않아 그는 산에서 내려왔다. 끈질기게 그를 붙들고 있던 음악이 필시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서른살에 들던 85년엔 서울시립대 작곡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준비했다. 학교에 들던해 부터 크고 작은 공연에 참여, 대학 2학년때는 벌써 자기이름의 명상음악을 발표했고, 이후 김자경 오페라단 상임반주자 겸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많은 작품들을 작곡, 연주하며 피아니스트로서의 자기세계를 빠르게 굳혀왔다. 이만한 속도로 달려와 이만한 유명세를 누린다는 것, 그에겐 얼마만한 의미가 있을까? “유명해진다는 건 그저 기분이 좋다거나 하는 문제지, 그 사람의 예술적 완성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사람이 유명해지는 건 완전히 완성됐을때 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 대부분은 완성되기도 전에 찾아오거나 아니면 다 완성된 뒤에야 찾아오거나 하죠. 많은 대중가수들이 한 번 히트하고 생명이 끝나버리는 것도 그걸 착각해서 그런거예요. 아직 정상도 아닌데, 벌써 최고에 온 걸로 생각하니 제대로 가기도 전에 당연히 쓰러질 밖에요. 저도 막 씨를 뿌린데 불과합니다. 이제 겨우 시작이니 앞으로 할 일이 한참이나 남았죠.”





    “쟁이에겐 진실함과 절실함이 필요하죠”

    95년엔 홍대앞 한 록카페에서 만난 한진경(32)씨와 결국 ‘인생 최대의 치열한 도장’인 결혼도 했다. 그리고 96년부터 들어와 살았다는 경기 안성의 집에서 그는 요즘 다시 작곡에 골몰하고 있다. 그런데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간다. 몸이나 마음 어딘가 분명 고장이 난 게 틀림없다. 정 안될 땐 쉬어볼만도 하지만, 작곡을 안하면 그건 더 ‘심심한’노릇이라서 안 될 말이다. 예술을 하는 쟁이노릇은 그래서 더 고통스러운거다. “쟁이에겐 얼마나 진실하고 절실한가. 진실함과 절실함이 생명인 것 같습니다. 아니 예술뿐아니라 모든 게 다 그렇지요. 단지 사람마다 그 색깔만 다를 뿐입니다. 너는 어떤 부분의 진실을 갖고 있느냐, 너는 어떤 진실의 종자냐, 결국 그게 중요한거죠.” 그는 어떤 진실의 종자일까? 피아니스트가 된 괴짜일까, 괴짜가 된 피아니스트일까? 아니면 그 둘 다 틀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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