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박용배칼럼] 인터넷기자와 멕 그린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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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05.25 19:17:00




  • 코소보 사태는 신문 및 방송등 기존의 매스 미디어 보도에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유고 정부의 언론통제, 나토의 방송시설 폭격은 이곳을 뉴스의 불모지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로럴 오리온이라는 위성망을 이용, ‘라디오B92’등 인터넷을 통해 그곳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도록 했다. 미국의 CNN, ABC등은 ‘인터넷 특파원’을 현지에 보내고 있다.

    미국의 미디어 전문잡지 ‘미디어인포’에 의하면 미국인이 뉴스를 얻기위해 이용하는 매체는 방송이 39%, 케이블TV 37% 지만 인터넷은 12%나 된다. 라디오는 9%, 신문은 2%다.

    그래선지 지난 5월5일 AFP는 20세기 언론에 일어난 10대 사건을 열거했다. 제1대 사건이 마르코니의 1901년 라디오방송. 제9대 사건이 92년 인터넷 신문의 등장이며 마지막 10대사건이 98년 멧트 드럿지가 모니카 스캔들을 그의 인터넷에 올린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또 한건의 사건이 터졌다. 걸프전때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의 폭격을 세계에 생생하게 알렸던 피터 아네트 CNN 특파원. 그가 CNN를 떠나 인터넷 리포트로 변신한 것이다.

    아네트는 원래가 AP의 베트남 특파원 이었다. 그는 라오스에서 메콩강을 헤엄쳐 타이에서 그곳 공산군과 정부군의 격돌을 세계에 알렸었다. 그가 메콩강을 건널때 입에 문것은 미국 여권과 20달러 짜리 였다. 그는 약간은 반전적이었지만 이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foreigntv.com으로 간다. 이 인터넷 사장은 그를 반기며 말했다. “그는 신문기자로서 쌓아온 유명세를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다. 그는 누구도 성역없이 만날 수 있는 인터넷기자이기 때문이다.”

    아네트 자신도 새로운 기자직에 대해 흥분해 있으나 그 성과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사담 후세인이 인터넷에 나와 인터뷰를 해 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매체를 통해 그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들기까지를 보도 할 수있다"고 했다.

    아직도 인터넷이 지향하는 속보성과 상호성이 신문이 지닌 비판성과 심층적인 면을 능가할지에 대한 논란은 일고있다.

    미국 신문협회가 지난 4월 조사한 바로는 인터넷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신문은 계속 성장하고 있을 것으로 조사됐다. 97년 4,040만부였던 발행부수는 98년 4,540만부로 늘었다. 종이 사용량도 90년 8,680만톤에서 98년에는 9,900만톤으로 늘었다. 우편 배달량도 1,660억부에서 98년에는 1,990억부로 늘었다.

    왜 그럴까. 지난 5월12일 워싱톤 포스트지의 논설주간이었으며 뉴스위크지의 백페이지 칼럼니스트인 멕 그린필드 여사가 3년간 암 투병에 숨졌다. 그녀는 61년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옮겨와 ‘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의 몇 안되는 친구가 되었으며 이 신문의 ‘4인방’이었다.

    그녀는 60·70년대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기전에 해방된 여성이었다. 포스트에 온지 1년만에 논설 부주간이 된 그녀는 사무실 문앞에 “나는 자유로운 여성이므로 해방을 사절한다”고 적어 놓았다.

    30세때 그녀를 본 퓰리처상을 받은 컬럼니스트 죠지·윌은 밝히고 있다. “그녀는 워싱턴의 언론문화를 바꿔 놓은 사람이다. 워싱턴이 미국의 정치의 중심이 되게 한 논객이다. 그녀에게는 정의와 진실에 대한 성역이 없었다”고 평했다.

    그녀와 함께 숫한 외국원수를 인터뷰한 칼럼니스트 짐 호그랜드는 평했다. “한국의 어느 장군 대통령이 정국의 안정을 자랑하자 조그마한 그녀는 물었다. ‘동서가 3,000만 달라를 훔쳤다는데 그 사람처는?’ 그녀는 용기있는 기자였다.”

    드럿지나 아네트나 인터넷 리포트들이 맥 그린필드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철학이나 세계관을 찾기는 아직 이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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