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새 밀레니엄에도 한국문학 살아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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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05.19 18:44:00




  • 21세기에도 한국문학은 여전히 살아남을 것인가? 남는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문학인들은 최근 들어 부쩍 이런 거창한 질문을 자주 한다. 위기의식 때문이다. 문학의 위기…. 백척간두에 섰다느니 사면초가에 몰렸다느니 죽는 소리를 해대는 인사들은 대개 90년대 이후 문학이 전혀 새롭고도 심각한 도전과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한다.

    위협이라…? 도전이라…?

    80년대까지, 아니 90년대 초까지도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권위주의 체제는 문학의 온상이었다. 그 엄혹한 체제 하에서 우리의 삶은 고달팠지만 비아냥대고 욕해 대고 짱돌과 화염병을 던질 수 있는 암울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은 문학에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바로 그런 현실에 포위돼 있었기 때문에 문학은 진지할 수 있었고 말 한 마디에 목숨 걸 수 있었고 목에 힘 줄 수 있었다.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만큼 자신들이 진실로 순수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기나긴 권위주의 체제의 터널을 벗어나면서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세상은 PC통신의 채팅방에 나오는 이야기들처럼 사소한 일을 가지고 사소한 고민을 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아니, 한술 더 떠 사이버시대, 정보화시대가 안방까지 쳐들어왔다.

    이런 변화가 정말 문학으로서는 위기인가? 21세기 문학의 종언을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 13일 대구 계명대에서 열린 ‘한국문학 작가대회-21세기 한국문학을 전망한다’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변을 제시했다. 시인 황지우 김정환 황동규 이성복, 소설가 이문열 이인성 김주영 김원일 김원우, 평론가 김화영 정과리 정호웅 김병익 김주연 민현기 서경석 등등. 스타 작가와 평론가들이 대거 출동해 엄살을 부리기도 하고 다짐을 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주로 소장·중견들이 발제하고 중진·원로들이 토론에 나섰다.

    맨 처음 엄살을 부린 이는 시인 황지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였다. 그는 시 분야 발제에서 자신의 낙향 체험 등을 들며 시의 위기를 말했다.

    “우리에게 식민지와 군사파쇼 폭력의 암울한 모습으로 다가온 근대의 끄트머리 어디선가 나는 낙향했다. 88년 전남 담양 16세기 정철 가사문학의 잔광이 남은 중세의 정원(소쇄원)에서 나는 5∼6년간 잘 놀고 왔다. 그곳에는 과거와 전통의 현존성이 어른거리는 그림자, 먼 기억의 유전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내게 영향을 준 전통이라야 60년대 시인 김수영과 소설가 김승옥부터였다. 정철과 송순이 놀던 소쇄원을 찬미한 훌륭한 한시조차 전혀 읽지 못하는, 전통에 대한 구강기적 결핍…. 더구나 우리 삶의 특수성은 지배적인 근대적 조건(모더니즘)에 전근대적인 조건(전통)과 후기근대적인 조건(포스트모더니즘)이 ‘삼겹살’처럼 중층결정돼 있는 혼돈, 서로 모순된 것들이 따로 놀면서 날마다 여기저기가 터지고 무너지고 아우성치면서도 금방 망하지 않고 아직 남아 있는 혼돈스러운 상황이다. 게다가 영상매체 등의 다면적 협공을 받고 있다.”

    그래 놓고 황 시인은 “귀족주의”로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보들레르의 ‘내 청춘은 캄캄한 번개다’나 한하운의 ‘붉은 울음’은 어떤 영상이나 회화, 음악도 따라올 수 없는 시의 형용사적, 은유적 힘을 보여준다. 도전받는 밀레니엄 시대에 시는 이런 정신적인 측면들의 섬세한 결들, 문자언어로서의 가치를 드높이는 작업,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불가능한 가치 쪽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근원적 귀족정신은 이 세상에 고귀한 정신과 진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이제까지는 문학이 너무 사회의 앞으로 나갔다.”

    이에 대해 이태수 시인(매일신문 편집부국장)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황 시인이 말하는 귀족주의는 시대적 흐름을 거슬러 오르며 벽을 쌓고 비인간화와 투쟁하겠다는 것인데, 엘리트주의는 시인의 개인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그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해달라.”

    황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귀족주의 문학은 시장에 대한 항체로서 나의 희망사항이다. 말하자면 ‘삐지는’ 태도다. 우리 세대의 젊음을 저당잡았던 민주주의가 시장적 공리주의로 바뀌고 돈 많이 버는 사기꾼이 신지식인으로 칭찬받는 발가벗은 모습 앞에서 ‘쫑따구’나서 숨고 빠지겠다는 자세다. 이처럼 작가는 현실에 대해 삐지기도 하고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삐짐은 실험성이 강한 작품을 써온 소설가 이인성(서울대 불문과 교수)에 이르면 불안과 강박관념으로 발전한다. 그는 ‘소설이냐 자살이냐-디지털 시대의 이야기 비판’이라는 발제에서 소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제공하는 면에서 영화를 비롯한 디지털 매체의 위력에 밀려 종언을 고할 지 모른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한다. 그리고 그 대책을 이렇게 제시한다.

    “집의 본질이 얼개 속의 공간이지 벽돌이나 시멘트가 아니듯이 소설을 소설답게 만드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은 소설에서 이야기를 빼버리고 난 나머지 부분 속에 있다. 말 하나하나의 질감, 말들이 이어지며 흘러가는 어투, 어투들이 번지며 얽히며 이루어지는 우주적 어조 등등. 요컨대 어떤 소설적 욕망과 의식이 어떤 문채(文彩)와 문체(文體)로 어떤 의미를 지닌 상상공간을 형성하느냐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설이 인간적 삶의 질에 기여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렇게 말해놓고도 소설의 미래가 불안했던지 “요컨대, 정신 차리고 잘 해보잔 얘기입니다”라고 다짐하는 것으로 발제를 끝냈다. 이에 대해 소설가 김원일이나 평론가 서경석 등은 이야기를 그토록 소홀히 함으로써 소설의 대중성이 약해지고 힘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러한 시와 소설의 위기상황에 대해 평론가 정과리(충남대 불문과 교수)와 정호웅(홍익대 국어교육학과 교수)의 ‘21세기 한국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발제는 충분한 배경설명을 해준다.

    정과리는 사이버시대의 특성을 위기의 주된 원인으로 보았다. “한국문학을 위협하는 것들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한국사회와 한국문화의 체질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뒤바꾸고 있는 것들이다. 우선, 90년대 들어 향유를 위주로 하는 소비문화와 멀티미디어, 자질구레하고 사소하기 짝이 없는 대중의 각종 취미생활을 부추기는 문화산업이라는 세 방향에서의 침공이 강력해지고 있다. 특히 사이버시대의 최소정보단위 비트(bit)가 등장, 다양한 조합과 변형을 통해 영상과 음향 등으로 구체화됨으로써 문학의 수단인 문자보다 훨씬 우월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정호웅은 현재 유행하는 문학의 양상을 분석하는 것으로 위기상황을 진단한다. “현재는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이다. 인터넷, CNN 등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은 영상예술이다. 생산과 전달, 폐기의 회로는 갈수록 더욱 더 빠른 속도로 회전한다. 이처럼 영상예술 속도에 적응한 관객들의 입맛을 유인하기 위해 더 빠른 장면전환과 사건 전개 쪽으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그는 이런 추세를 반영또는 영합하는 경향이 80년대부터 시작된 역사소설이라고 규정한다. “역사소설은 한 뛰어난 주인공이 자신의 천재성과 야망을 실현하는 과정을 빠른 속도로 그려나간다. 영웅적 인물의 거침없는 삶, 그 일직선의 동선(動線)을 흐르는 속도에 실려 사람들은 환각을 경험한다. 역사소설의 비현실적인 속도를 쫓아 자신을 잊고 동시에 현실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90년대 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의 또 하나는 낭만적 초월지향성이다. 세기말 현실을 버리고 저 관념의 세계로 비상하는 낭만적 초월지향성은 이 타락한 세계에 대한 근본 부정이며 이성의 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그런 점에서 낙관적인 리얼리즘의 오만에 대한 근본적 회의의 드러냄이다. 그러나 관념의 환각에 정신을 부리고 거룩한 포즈에 도취하는 나약한 정신도 깃들어 있다. 길을 찾아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치열성이 부재하는 초월은 환각 속으로의 도피일 뿐이며 때로는 겉만 그럴 듯한 치장일 뿐이다.”

    두 평론가는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문학의 살 길을 인간적인 가치를 높이면서 비판과 반성, 성찰을 강화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특히 정과리는 이러한 방향을 시적인 표현으로 제시한다. “세상 속으로 스며들기, 스며들기 위해서 저를 녹이기, 그렇긴 하되 저의 본성을 버리지 않고서 스며들기, 스며들어 저의 본성의 용액으로 세상을 녹이기, 질주와 확산으로 아득한 이 현대문명의 세계에 벌레와 파충류들이 우글거리는 습기찬 고뇌의 웅덩이들을 파기, 혹은 결코 건널 수 없는 아득한 살수(薩水)를 문명의 욕망과 문명 사이에 설치하기. 그것은 문학이 문명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대신 문명과 동서(同棲)하면서 불화의 칼날을 사이에 그어놓고 있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두 평론가의 발제에 대한 토론에서 평론가 김병익(문학과지성사 대표)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관심을 끌었다. 문학의 위기는 그리 걱정할 문제가 아니며 21세기에도 뭔가 새로운 문학이 나올 것이란 반박이었다. “발제자들이 앞으로 100년 사이에 문학이 얼마나 변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도외시하고 문학을 너무 정체적으로 파악한 것 같다. 100년 전 문인들이 지금의 문학을 본다면 한국문학은 죽었다고 자폭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19세기 말의 한국문학을 본다면 그것을 과연 근대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문학이란 관념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중세에도 근대에도 문학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이라고 믿어온 문학의 개념이 깨질 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불안이다. 꼭 책의 형태가 아니라도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 다른 매체에서 문학적 감동, 문학성은 남을 수 있다.”

    문인들은 전망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같이 문학의 끈을 놓치 않으려 했다.

    이광일·주간한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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