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땅이름으로 보는 조상들의 지혜5] 종로구 창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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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05.04 17:14:00




  • 서울 종로구 훈정동(薰井洞)은 본시 ‘더운 우물골’이라 불러오던 곳으로, 1914년 4월 1일 일제가 부제의 실시에 따라 옛 중부 정선방(貞善坊)의 대정동(大井洞), 묘동(廟洞), 후정동(後井洞)의 각 일부를 장통방(長通坊)의 묘전동(廟前洞), 순라동(巡羅洞)의 각 일부와 합하여, 이곳에 있는 ‘더운 우물’을 한자로 뜻빌림(意譯)한 일제식 땅이름. 이 훈정동에는 조선조 역대 군왕(君王)을 모신 종묘(宗廟)가 있다.

    종묘는 대묘 또는 태묘(太廟)라고도 하며 1395년(태조4년)에 창건하여 나라에서 사직단(社稷壇)과 함께 가장 중요시 하던 사당이다.

    종묘는 본전(本殿)과 별묘(別廟:永寧殿)로 나뉘어져 있다. 본전에는 역대 왕 가운데 공이 많은 왕의 위패가, 별묘에는 태조의 고조(高祖)인 목조(穆祖)를 비롯하여 본전에 모시지 아니한 왕과 추숭(追崇)된 왕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제사는 1년에 1, 4, 8, 12월 등 4차례 지낸다.

    흔히 나라를 ‘종묘사직’ 이라고들 하는데, 종묘나 사직이 곧 국가 그 자체라 생각할 만큼 중요시 되었기 때문이다.

    종묘는 지은지 200여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자 일본군 총대장 우끼다가 이곳에 진을 쳤다. 그런데 밤이면 병사들이 자주 변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인 남별궁으로 옮겼다. 일본군은 뒤에 서울을 물러갈 때 종묘를 불살라 버렸다. 종묘는 광해군 때 중건됐는데 그 규모가 전보다 훨씬 웅장하다는 것이다.

    이 종묘의 정문에는 ‘창엽문(蒼葉門)’이 씌어 있는데, ‘창(蒼)’은 20(卄)과 8(八)과 임금(君)의 합성 글자이고, ‘엽(葉)’또한 20(卄)과 8(八)과 세(世)로 구성되어 있어 종묘안에 모셔진 조선조 28위(位)의 군왕과 일치되고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다(이태조의 선조인 목조를 포함).

    조선왕조는 태조(李成桂)가 개국한 이래 27대 순종(純宗)조에 이르기 까지 27왕으로 왕직을 마감했지만, 이태조의 선조인 목조를 포함 28위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목조는 어디까지나 추존왕일 뿐이다.(조선조에 추존왕이 어디 한 두명이겠나…) 그런데 신기한 일은 조선조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이은(李垠: 고종의 세째아들)이 태자로 책봉되어 영왕(英王: 흔히들 英親王’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일제가 ‘英王’ 글자 사이에 ‘親’자를 끼워넣은 것. ‘의왕(義王)’도 마찬가지로 일제가 의도적으로 ‘의친왕(義親王)’의 개칭한 것이다)이 11세 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고 일본 나시모도 노미야(梨本宮)의 딸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다.

    그 뒤, 조국이 광복된 뒤에도 환국하지 못하고 있다가 일본에 간지 56년만인 5·16쿠데타이후에 돌아와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머물러다가 세상을 떴다. 영왕이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기전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만큼, 죽은뒤 종묘 영령전에 위패가 봉안되니 조선왕조의 28위가 된 셈이다.

    ‘창엽문’의 뜻은 조선왕조가 길이 푸르게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중신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 파자(破字)가 모두 28대 임금과 일치하고 보니 처음 이름을 지을때 부터 조선왕조의 종말까지 예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신기하기만 하다. 종묘의 정문인 창엽문의 현판은 한국전쟁때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홍환·국학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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