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인간탐구] 코미디 황제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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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11.30 18:35:00


  • 요즘 내 입장은 묘하다. 이주일(59)도 아니고 정주일도 아니다. 지금도 바깥에 나가면 이주일씨라고 부르는 사람이 열명, 정의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열명이다. 처신이 쉽잖다. 처음엔 많이 헷갈렸다.

    국회에서 나온 뒤 처음 디너쇼를 했을땐 첫회 공연에서 이주일이 반, 정주일이 반이 되는 바람에 망쳤다. 헷갈리는건 나만도 아닌 것 같다. 이주일로 공연을 하는 요즘에도 내 코미디를 보다말고 “전에 국회의원이었다는 사람이 뭐 저래”하는 이들이 어쩌다 한명씩은 꼭 있다는 거다. 하지만 이번 ‘이주일 울고 웃긴 30년’ 공연때엔 틀림없는 이주일이다. 완전한 이주일로만 봐주기를 바란다.





    희극배우 30년 정리, 코미디언 이주일로 봐주기를...



    이번 공연은 희극배우 30년, 무명시절까지 합치면 40년 세월을 코미디에 바친 내게 참으로 중요한 자리다.

    특히 대중문화를 한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꼭 한번 서보고 싶어하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그것도 코미디언 제1호로 들어서는 뜻깊은 자리다. 더구나 예전에도 이미 몇차례 ‘여기가 어딘데 코미디언이 서냐’고 거절을 당했던 나로서는 더 감개무량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이 그만큼 바뀌었다. 그 문턱 높던 곳이 이제 우리 대중문화예술인들에게도 문을 열게 되다니. 참 반갑고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 부담만큼 작업도 쉽지않다. 두달이 넘게 연습을 하고 있지만, 춤도 예전같이 쉽게 되지 않고, 특히 100부작 드라마로 엮어도 모자랄 내 인생 30년을 단 두시간짜리로 줄이자니 보통 힘든게 아니다.

    내 인생? 그동안 워낙 방송을 많이 타 웬만한 사람들은 희미하게나마 엄청 고생한 사람이란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났고, 너무나 가난해서 돈을 벌 생각으로 연예계에 뛰어들었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을 것이다. 사실 돈을 벌겠다는 건 반은 핑계였을 수도 있다. 돈을 벌려면 다른 직업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무조건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다. ‘비범’한 외모라도 어떤가. 하고 싶은건 어쨌든 해야하니까.

    60년부터 유랑극단을 따라나섰다. 한때 가수 남진의 귀국쇼가 열렸을 땐 잘하면 보조진행자로 무대에 오를 뻔도 했다. 하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어느날 인원정비를 한답시고 단장이 일제히 단원들을 모아놓더니 대뜸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이건 뭐야” 하고는 바로 쫓아버렸다. 별 수 없이 더 떠돌다가 69년 파월장병 공연으로 처음 무대다운 무대에 섰다.

    그리고 79년 하춘화쇼의 향단역에 대타를 맡으면서 조금씩 이름이 알려진 뒤 이듬해 TBC의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출연하면서 확실한 인기를 얻었다. 내 트레이드 마크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유행어도 그때 나왔고, 단 2주일만에 나는 스타반열에 올라있었다. 이주일이란 이름도 그래서 생긴거다.





    ‘못생겨서’죄송하다 5공때는 ‘닮아서 고생’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한 가족들에 대해서는 지금도 할 말이 없다. 금호동 판잣집등을 전전하며 영세민 신세로 살던 시절, 쌀죽 한번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고 눈을 감게 한 아버지의 기억 등등, 이런 얘기는 그간 알려지기도 많이 알려졌고 지금도 말하기가 고통스러워 웬만하면 건너뛰고 싶다.

    인기 코미디언이 된 뒤 십여년 동안에도 별별 일을 다 겪었다. 못생겨서 죄송한게 아니라 ‘닮아서 죄송’해야했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닮았다는 이유로 1년이나 방송에 나가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의 진짜 일대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국회의원이 된 일이다. 92년 총선때, 나는 현대 정주영 회장의 전력지원을 받아 경기 구리시에서 출마했다. 첫 유세장에서부터 당선의 전조가 보였다. 첫 유세때의 기억, 참모측에서 종이에 뭔가를 빽빽하게 적어주었다. 공약사항이었다. 그걸 주며 거기에 쓰인대로 ‘이 다리도 놔주고, 이 길도 닦아주고, 양로원도 세워준다’고 말하라며 그래야 표를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연단에 오른 나는 “우리 정책보좌관이 여러분한테 이거 이거 다 해주겠다고 말하라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난 자신이 없다. 이미 국회의원이 됐던 사람도 못해주는 판에 이제 처음 나서는 사람이 어떻게 해내겠냐. 다만 해줄 수 있는지 없는지 들어가서 함께 보자. 그런데 아무래도 못 해줄 것 같다”고 해버렸다. 청중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다. 난 대본도 없었다. 평생을 대본없이 코미디를 해 온 사람이 왜 새삼 대본이 필요하겠는가. 다른 후보들을 보니 손을 덜덜덜 떨면서 연설문을 읽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우리의 유세는 참 재미있었다. 몰려든 인파부터 달랐다.

    다른곳은 겨우 1,000여명을 넘길 때, 우리 유세장엔 만명, 1만5,000명씩 몰려들었다. 서울에서 일부러 구경 온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겐 선거유세가 아니라 거의 시사풍자쇼 같았을거다. 나중엔 상대 후보측 띠를 두른 운동원들까지 넋을 놓고 앉아 내 연설에 박수를 치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 꼴이 보기 싫어 얼마뒤엔 자기 연설만 마치면 후딱 유세장을 나가버리는 후보도 있었다. 그렇게 당선됐다.





    폭발적인기업고 국회진출, 정작 정치판선 고전



    그러나 국회에 들어가선 아주 고전했다. 뭣보다 철저히 무시를 당하는게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 동료의원들이며 정부기관들까지 나를 여전히 코미디언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내 말은 뭐든 우습게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정부질의때도 내가 “장관!” 첫마디만 떼면 벌써 웃기 시작했다.

    심지어 취재기자들까지 키득거렸다. 아무도 내 진지한 얘기를 받아주지 않았다. 한때는 왕따까지 당했다. 국회의원이 된 후 5개월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도 세비가 꼬박꼬박 나왔다.

    그런데 마침 고향후배인 황영조 선수가 그 무렵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걸 보고 “나는 한 일도 없이 이 돈을 받았는데 자네는 진짜 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을 했으니 자네가 이 돈을 받는게 좋겠다”며 그간 받은 5개월치 세비를 격려금으로 줬는데 “당신만 생색내냐, 그럼 우린 뭐가 되냐”며 다른 의원들이 여간 화를 내는게 아니었다. 그렇게 완전히 따돌림을 받고 나니 정말 발 붙일 곳이 없었다.

    몇 달을 그렇게 겉돌다가 결국 ‘이걸 극복하려면 아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좌관도 10명이나 두고 국정감사때면 아예 호텔에서 살다시피 주야로 열심히 공부했다. 상황을 바꾸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진거다. 전엔 상대해주지 않던 의원들이 서서히 내 말에 귀기울이기 시작했고 나중엔 완전한 한사람의 정치파트너로 인정을 받게 됐다.

    93년 국정감사때엔 그때 한 일간지가 뽑은, 맹활약 의원 10명중 7번째에 내 이름이 올랐을 정도. 실제로도 참 열심히 일했다. 92년 대입시때 채점오류를 밝혀낸 일이나, 폐교지의 무단용도변경, 99.9%가 ‘짜고 해먹는’ 정부기관 건설공사비리 지적, 도농교류체험학습 아이디어도 모두가 내 작품이다.

    이런 4년전체의 성과를 돌이켜볼 때, 지금도 나는 국회의원 정주일로서 임기중 내 역할을 나름대로 다 하고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때 시원찮았다면 왜 지금도 지역구에서 내게 출마 얘기를 꺼내겠는가, 이것만 봐도 알만한 일 아닌가.



    물론 마음에 걸리는 일이 전혀 없는건 아니다. 말 때문에 혼이 난 적도 있다. 언젠가 당시 김 모 교육부장관에게 “당신은 애를 낳아본 적 있냐. 애도 안 낳아본, 학부모도 안 돼 본 사람이 어떻게 대입시 때문에 고통받는 자녀나 그 부모 심정을 알겠느냐”고 했다가 특히 여성단체로부터 심한 항의를 받았다.

    또 국회를 물러나면서 “코미디 한 수 배우고 갑니다”라고 했던 것도 국민들은 좋아했을지 몰라도 의원들에겐 적잖은 미움을 샀다. 아직도 그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해명하자면, 그건 그냥 편한 마음에 코미디언으로서 한 말이지, 무슨 악의를 갖고 한 말이 전혀 아니다. 어쨌든 죄송하고, 잘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들은 그만큼 자리 잡기가 어려운 곳이 국회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도 일부 일류대학 출신의 의원을 빼고는 나같은 연예인 출신 의원 열이면 열, 틀림없이 똑같은 고통의 과정을 겪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다. 국회는 꼭 정치쪽 사람들만 모여 있어선 안된다. 각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골고루 있어야 하고, 우리 대중문화예술쪽에서도 누군가는 반드시 들어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임기 4년이 끝났을 때 나는 미련없이 국회를 나왔다. 당시 인터뷰를 할 때도 “역부족이다. 더 이상 정치 할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더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뭣보다 지역구 관리에 하도 데여 하루라도 빨리 나오고 싶었다. 챙겨야 할 경조사는 왜 그리 많은지, 또 국회에 있다보면 당장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지역구에서 수시로 불러내린다. 부랴부랴 달려가보면 별 일도 아니다.

    그냥 행사에 얼굴 좀 비춰주고 같이 놀자는 거다.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일을 해야지, 그런식으로 불려다니면 제 할 일을 못 한다. 더구나 난 평생 어디 가서든 주는 돈 받으며 대접을 받아보기만 한 연예인이었다. 그런데 이건 내 돈을 주면서도 그렇게 시달려야되니…. 그 문제만 아니면, 똑똑한 보좌관 하나 두고 자기만 열심히 해도 국회의원 노릇, 다 잘할 수 있다.





    의사당앞 지날땐 그리움, 정치란 모르는 일

    그렇게 질려 두 번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던 국회인데, ‘이주일의 투나잇쇼’ 관계로 부득이 여의도에 자주 드나들게 됐을 땐 조금씩 마음이 달라지기도 했다.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칠 때마다 조금씩 그리움 같은게 생기는 것이다. 더 잘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 같은 것 말이다. 생각치도 못했던 일이다. 그럼 또 정치할 생각이 있냐고? 그건 아니다. 지금도 정치 할 마음은 여전히 없다.

    그러나, 단정은 짓지 않겠다. 지금으로선 할 마음이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때려죽여도 안하겠다”는 소리는 아니라는 얘기다. 특히 정치란 본인의 의사 외에도 때론 주변의 여건이 상황을 만드는, 특수한 변수가 있다.

    이 정도 선에서 이해해주면 좋겠다. 방송을 그만둔 뒤 지난 1년 7개월간에도 나는 조용히 살아왔다. 성남 분당에 3,000평쯤 되는 농장을 두고 닭, 오리, 토끼 등 가축도 기르고, 벼농사며 배추농사, 파, 상추, 시금치 등도 가꾸며 농사꾼처럼 지냈다. 그동안 못다했던 남편노릇, 아버지 노릇도 하고, 좋은 시간들이었다.

    91년 사고로 잃은 아들 생각도 이젠 그럭저럭 견딜만 하다. 그 아이의 아명을 따서 만들었던 월암장학회 일도 계속해야되고, 할 일이 많다. 더구나 이번 공연을 마치는데만 1년이 걸린다. 지방도시를 다 돌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변에선 뭐라고 정치 얘기를 한들, 내가 거기에 신경 쓸 시간이나 마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요즘 정치판만 보면 공연히 흥분된다. 밀레니엄 밀레니엄 하는데, 우린 21세기를 준비하기는 커녕 오히려 후퇴만 하니 볼수록 답답하다. 듣기도 지겨운 옷로비 사건이나 언론문건 얘기만 벌써 몇 달째냐.

    최근엔 거기다 10여년전 밀입북사건까지 나오는 판이니 이러다간 조금만 더 있으면 용의 눈물 시대까지 돌아가는건 시간 문제일 것 같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냐. 나는 원래 무대만 벗어나면 집에서도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하는 무뚝뚝한 사람인데, 이렇게 정치 얘기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된다. 나도 어쩔수 없다.

    곧 있을 내 공연은 참 볼만 할거다. 특히 공연 마지막날인 12월1일은 내 60회 생일인데, 친구들 300명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형케이크를 가지고 와서 축하를 해주겠다고 했다. 결코 만만하거나 비실비실한게 코미디언이 아니란걸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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