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로비스트] 돈거래 수준 못벗어난 '브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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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12.07 16:58:00


  • 검찰총장과 청와대 법무비서관. 아무리 난다 긴다하는 사람이라도 이들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는 자리다.

    올초부터 계속된 옷로비의혹사건에도 건재하던 이들이 홀연히 나타난 한국계 미국인의 ‘손바람’에 결정타를 맞고 사법처리되고 말았다. 이에따라 국민들의 관심은 갑자기 무대위로 등장한 육순의 한국계 미국인 박시언씨에게 몰리고 있다.

    국민들을 혼동시키는 것은 박씨의 최근 행적. 박씨는 지난해 신동아그룹 부회장으로 영입돼 당시 사법처리위기에 몰린 신동아그룹 최순영회장의 구명을 위해 활동을 벌인 로비스트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씨의 최근 행동은 그동안 국민들이 갖고 있던 로비스트의 어두운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박씨는 김태정 전 검찰총장과 여권 실세정치인들을 만나 최전회장의 구명을 부탁했다고 꺼리낌없이 말했다. 또 특별검사와 대검찰청에 출두해 조사를 받은뒤에는 바로 기자실에 들러 조사받은 내용을 전해주고 대한생명을 회수하겠다고 공언하는 등 너무나도 당당하게 행동해 국민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재계 관계자는 “박씨가 미국과 한국의 풍토가 다르다는 점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촌평했다. 공병장교로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오랬동안 미국생활에 익숙해진 박씨가 한국의 사정을 모르고 미국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로비스트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인식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허가과정개입, 거간꾼 노릇



    국어사전에는 로비스트를 ‘미국에서, 늘 의회의 로비에 드나들면서 특정단체·그룹의 이해를 대표하여 압력을 가하는 사람들’로 규정해 놓고 있다. 전문지식과 지명도를 배경으로 입법과정에서 특정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정상적인 직업이다.

    그러나 로비스트의 이미지는 태평양 건너 한반도로 넘어오면서 사건과 인·허가과정에 개입해 정·관계와 검찰 등에 다리를 놓아주는 브로커로 변질됐다. 악취가 풍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회가 떠들썩한 사건이나 사업자결정 등에는 항상 로비스트의 개입과 돈거래의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한국 로비스트의 속성이지만 서투른 로비스트들의 경우 가끔 실체가 밝혀지기도 한다. 최근 경기은행 퇴출과정에서 돈을 받은 혐의로 사법처리된 임창렬 경기지사 부부사건이 대표적이다. 검찰은 인테리어업자 민모씨가 경기은행측의 부탁을 받고 임지사 부부에게 접근, 돈을 건네준 사실을 확인했다.

    92년에는 범양상선측이 로비스트를 해고하면서 사기사건으로 비화해 법정싸움이 벌어져 기업체의 로비스트 활용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전문지식보다는 학연·지연에 매달려



    우리나라의 특성상 로비는 전문지식이나 지명도보다는 대부분 고향이나 학연, 친·인척 등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로비를 집중적으로 받는 법조계나 정치권 인사들의 공통된 말이다.

    한나당 김홍신의원은 “학교 선후배는 물론 군 선후배나 사돈의 팔촌까지 걸어서 접근한다”며 “이들중 대부분은 논리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설득하기 보다는 막무가내로 돈봉투를 놓고가 돌려주느라 애를 먹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박시언씨가 위기에 몰린 신동아그룹측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박씨가 전남 목포출신이라는 점과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현정부의 실세들과 친분을 맺었다는 점 등을 신동아그룹측이 높이 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현대전자 주가조작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한창 진행되던중 현대증권 이익치회장이 잠적하자 증권가에서는 사법처리 범위를 놓고 물밑로비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특히 이회장이 학연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재계 관계자는 “한진그룹 탈세사건과 서울지방 항공청장 등 건교부 간부들에 대한 뇌물로비에서 드러났듯 대부분의 기업들은 사내에서 고향이나 학연 경력 등에서 로비에 적합한 인물을 발탁하거나 전직 관료출신들을 스카우트해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PCS(개인휴대통신)사업 등 대형 사업 인·허가의 경우 권력층 친·인척이나 거물급 인사가 개입했다는 의혹도 끊이지 않지만 아직까지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삼성로비시스템 국내최고수준



    한보사태에 대한 검찰수사는 우리나라 정·관·재계의 로비수준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은 96년 황병태의원에게 “산업은행의 지급보증여부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한뒤 황의원과 관계없이 대출이 이뤄졌지만 황의원에게 2억원을 건네주었다. 국회 재경위원장인 황의원의 활용도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정총회장은 또 96년 10월 국정감사때 야당의 한보관련 자료제출 요구를 무마해달라는 조건으로 오랜 친구인 한나라당 정재철 의원을 통해 권노갑의원에게 1억원을 건네려고 했다. 물론 이 돈은 정의원이 중간에 가로챈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비하면 삼성그룹의 로비시스템은 한국 최고의 기업답게 체계적이고 수준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삼성직원들은 입사때부터 자기가 잘아는 사회저명인사 이름을 제출, 그룹차원에서 인물정보망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또 다른 분야에 진출한 ‘삼성맨’들과 인연을 유지하는 등 다양한 인적정보를 바탕으로 설득력있는 논리를 제시해 정·관계의 결정권자를 공략하는 것은 물론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치밀한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 재계의 공통적인 평가다.

    삼성이 자동차사업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체계적인 로비시스템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다.





    대형사건마다 ‘리스트증후군’확산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로비행태는 돈거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리스트증후군’이 확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려대 최현철교수(신문방송학)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책결정과정에 관련 단체나 이해집단의 입김을 배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며 “미국처럼 로비스트들을 양성화해 엄격히 관리한다면 음지에서 돈거래가 성행하는 것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ongy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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