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해적] 일본, 동남아 해적들과의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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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12.07 19:05:00


  • 10월22일. 말라카 해협을 항해중이던 파나마 선적의 ‘아론드라 레인보’호가 실종됐다. 아론드라 레인보호는 이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항을 출발해 후쿠오카(福岡)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배에는 이케노 이사오(池野功·67) 선장과 일본인 기관장, 필리핀 선원 15명 등 모두 17명이 타고 있었다. 화물은 70억원 어치의 알루미늄괴(塊).

    레인보호는 지난해 4월 취역한 새 배였다. 일본 이무라(井村) 기선이 선주로 있는 대형화물선으로 선박 가격만 10억엔(100억원)에 달한다. 해로를 손바닥보듯 경험이 풍부한 선장이 모는 신형 화물선이 종적을 감춘 것이다.

    “해적의 습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감을 잡은 이무라 기선측은 6일 뒤인 28일 해상보안청에 사건을 신고했다. 해상보안청의 대책반이 즉각 가동됐다.레인보호가 다시 발견된 것은 실종 22일만인 11월13일 인도 중서부 앞바다. 인도 해안경비대가 강제 정선시킨 뒤 해적으로 보이는 선원 15명을 구속한 것이다. 선장과 선원들은 앞서 8일 구명보트로 11일간 표류한 끝에 어선에 구조됐다.





    해상보안청, 무장병력까지 파견



    아론드라 레인보호 사건은 일본이 해적문제에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수색·추적작업에는 일본 해상보안청이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물론 국제해사국(IMB)을 축으로 동남아 해역 주변국과 인도까지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에서 모처럼 국제 공조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해적 단속은 해상에서는 어렵고 화물을 팔려고 상륙할 때를 노리는 육상 단속이 효과적이라는 각국 경비당국의 인식을 깼다는 점도 평가되고 있다.

    레인보호 수색·추적은 실질적 선주인 이무라 기선이 해상보안청에 피해를 보고하면서 곧바로 시작됐다. 해상보안청은 즉각 콸라룸푸르의 IMB 사무소에 연락했고 IMB는 말라카해협과 필리핀해를 지나는 모든 선박에 수색경보를 발했다. 모양이 비슷한 화물선이 필리핀 앞바다에 나타났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마닐라항에서 연료와 물을 채우고 출항, 서쪽으로 향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이 정보를 입수한 해상보안청은 가고시마(鹿兒島)현 10관구본부 소속의 헬리콥터 탑재 순시선 ‘하야토’호(3,800톤)를 현장에 파견했다. 해적과의 조우를 고려, 무장한 특수부대가 승선한 것은 물론이다.

    또 도쿄(東京) 하네다(羽田)의 3관구기지에서 수색기 ‘팔콘’이 발진, 마닐라 공항을 임시기지로 삼아 남중국해를 수색했다.

    해상보안청의 수색은 필리핀 서쪽에서 말레이시아 동쪽에까지 걸쳤으며 이케노 선장 일행이 한창 표류중이던 11월 초까지 계속됐다. 해상보안청은 비록 공해상이지만 무장 순시선의 수색 활동이 주변국의 감정을 건드릴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이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사전 연락을 받은 주변국 해경 당국의 수색 활동을 크게 자극했다. 또한 말라카 해협을 빠져 서진했을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인도 해안경비대에도 경계령이 발동됐다.





    말라카해협서 실종, 인도해역서 발견



    인도 해안경비대 순시선 ‘타라바이’호는 11월14일 밤 10시께 남서부 코친 앞바다에서 괴선박을 레이더로 포착했다. 괴선박을 추적해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까지 접근하자 갑자기 방향을 북서쪽으로 틀어 달아났다.

    무선으로 정지를 요구했으나 반응이 없어 위협사격을 가하며 추격을 계속했다. 이튿날 오전 해안경비대 수색기로부터 레인보호와 배모양이 비슷하다는 연락이 들어 왔으나 괴선박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뭄바이(봄베이) 본부의 공격허가를 받은 타라바이호는 배바닥을 향해 기총소사를 시작, 밤새 사격을 계속했다. 인도 중서부 고아주에서 400여㎞ 떨어진 해상에 도착한 16일 오전 7시께 괴선박의 선미에서 불길이 일면서 마침내 속도가 떨어졌다.

    인도 해안경비대는 배에서 14명의 20~40대 동남아인들을 붙잡았고 20일 고아항으로 예인해 이들을 바로 경찰에 넘겼다. 붙잡힐 당시 이들은 미리 처분한 듯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고 증거인멸을 위해 각종 물건을 태우다가 배에 불이 붙은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배를 침몰시키려고 일부러 밸브를 열어 1층 갑판까지 물에 잠긴 상태였다.

    배는 이름이 바뀐 것은 물론 선체까지 검은색으로 새로 칠해져 있었다. 실려 있던 7,762톤의 알루미늄괴는 3,762톤으로 줄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인도네시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배를 빼앗은 해적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알루미늄괴 처리를 위해 아랍에미리트로 향하던 길이었다고 밝혔다.

    인도 경찰 당국은 이들이 짧은 시일내에 선체를 새로 칠하고 알루미늄괴를 하역한 등의 사실로 보아 최소한 40명이 넘는 조직의 일원이라고 보고 있다. 화물 운송 정보를 수집하고, 해상 납치를 실행하고, 물건을 파는 조직이 밀접하게 얽혀 있으리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수사과정에서 많은 사실들이 밝혀질 것으로 보여 해적 수사가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해적피해 70%가 동남아해역에서



    일본이 이같이 신속한 행동을 보인 것은 해적문제가 일본을 괴롭혀 온 골치덩어리였기 때문이다. 일본재단이 올봄 일본내 해운회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94년 이래 66건의 해적 피해가 있었고 이중 7할이 동남아 해역에 집중됐다. 부상자나 행방불명자도 20명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IMB 해적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올들어 지난 9월말까지 동남아 해역에서는 모두 96건의 해적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해에만 일본 해운회사는 크고 작은 12건의 피해를 보고했다. 심지어 중국 무장경관이 공공연하게 해적과 다름없는 행동을 한 예도 있어 두려움을 가중시켰다.

    레인보호 사건은 지난해 발생한 텐유호 사건과 극히 닮았다. 우선 알루미늄괴를 운반하고 있었고 해적들이 사전에 정보를 탐지, 출항하기를 기다려 같은 말라카해협에서 선박을 통째로 강탈했다. 텐유호가 중국 당국에 발견될 당시 ‘SANEI-1’로 이름이 바뀌었고 실려 있던 알루미늄괴는 사라졌다. 16일 인도 해안경비대에 나포된 레인보호도 이름이 ‘메가 라마’로 바뀌었고 알루미늄괴는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선원들의 종적을 찾을 길이 없이 빈 배만 발견, 범행의 윤곽조차 밝힐 수 없는 텐유호와는 달리 레인보호는 선원들의 증언이 가능한 데다 범행그룹으로 보이는 무리가 배와 함께 붙잡혔다. 동남아 해역에서 해상납치를 거듭하고 있는 해적의 꼬리를 잡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최대피해국 일본, 대책마련 서둘러



    레인보호 사건에서 보듯 현재 동남아 해적에 대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최대 피해국인 일본이다. 석유와 천연자원 모두를 말라카해협을 지나는 수송로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동남아 해역의 불안은 국가적인 위협이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는 지난달 28일 마닐라에서 열리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의 정상회담에서 해상경비 강화와 철저한 해적 대책을 연안국에 요청했다.

    일본 운수성은 올 7월 해상보안청, 외무성, 일본선주협회 등으로 ‘해적대책 검토회의’를 발족, 연안국에 경비 강화를 요청하고 선박회사의 자주경비를 강화하도록 하는 등의 행동계획을 마련했다. 또 일본재단이 8월 문을 연 ‘해적정보 데이터베이스’에는 해운회사와 지방자치단체 등의 접속이 끊이지 않고 있다.

    16일 일본재단이 도쿄 미나토(港)구에서 연 ‘해적대책 세미나’도 일본이 동남아 해적 대책에 얼마나 열성적인지를 확인시켰다. 해운관계자 등 약 160명이 참석한 이 세미나에서 IMB의 포텡갈 무쿤댄 사무국장은 “해적에 배를 빼앗겨도 배의 위치를 알 수 있으면 별 어려움이 없다”면서 “인공위성을 이용해 선박의 위치를 알려 주는 추적장치를 갖추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첨단장비가 해적 대책의 전부는 아니다. 해상보안청 사카모토 시게히로(坂本茂宏) 구난과장은 “나라에 따라 경비·구난 담당부서가 갈라져 있는 등 체제가 달라 앞으로 각국 관계자들이 얼굴을 맞대고 신속한 연대를 도모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상보안대학 무라카미 레키조(村上曆造) 교수도 “관계국의 협력이 전제되지 않는 어떤 대책도 효과를 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동남아 각국이 스스로의 이해를 넘어 본격적인 국제 공조체제를 수립할 수 있을지는 일본과 같은 해상 수송로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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