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로비스트] "외교와 로비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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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12.07 17:08:00


  • 외교와 로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대상과 목적이 조금 다를 뿐 그 근본은 하나로 통한다. 유능한 외교관이 최고의 로비스트로 변신하는 것도 이런 연유다.

    우리나라처럼 전문적인 로비스트가 없고 남북이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외교 로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위치한 재단법인 중남미문화원 병설 박물관. 전직 로비스트 취재를 위해 찾아간 이곳에서 기자는 백발의 한 노신사를 만났다. 이복형(68) 박물관장. 고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원장은 로비스트를 취재하러 왔다는 말에도 크게 개의치 않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대부분의 국내 로비스트들이 자신이 로비스트라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과 크게 대조된다. 굵직한 원목으로 장식된 3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그는 손수 차까지 끓여 주며 전직 외교관이자 로비스트로서의 30년 인생을 털어놓았다.





    30년 외교관생활 대부분 중남미서



    외교관으로 30여년을 마친 외교통답게 이 원장은 국가간 외교 로비로 서두를 열었다. 이 원장은 현역을 떠난 지금도 우리 정부에서는 첫손 꼽히는 중남미 외교통이다.

    서울 태생인 이 원장은 서울고, 동국대(법학과)를 나와 미국 조지아주립대(1954년), 호주 맬버른대학원에서 수학한 뒤 1962년 대통령 비서실 의전 비서관(영어통역)을 시작으로 멕시코대사관 1등 서기관, 주스페인 대사관 참사관, 주코스타리카 대사 대리(공사), 주도미니카 대사, 주아르헨티나 대사, 주멕시코 대사 등 대부분의 외교관 시절을 중남미에서 보냈다.

    그는 60~70년만해도 국내에서는 ‘로비’에 대한 개념 조차 없었다고 말한다. 당시는 국제 질서가 미국과 소련이라는 동서 냉전체제로 나눠져 있던 시대로 남·북한은 각각 UN과 비동맹회의에 가입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던 때였다.

    남·북한은 서로 개발도상국 하나라도 더 자기편을 끌어들여 UN 총회와 비동맹회의에서 지지표를 얻어내려고 총력전을 펴던 그런 시절이었다. 당시 남·북한 모두 전문 로비스트라고는 전무한 상황이라 정상적인 외교 루트를 통한 국가간 교섭보다는 즉흥적인 일대일 밀실 로비가 주를 이뤘다고 이 원장은 말했다.

    “60~70년대는 정말 남한과 북한이 각기 제3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피말리는 로비전을 전개했다. 당시는 남·북한 사람들은 상대 외교관을 모두 공작원이나 로비스트 정도로 여겼을 정도였다”는 것이 이 원장의 회고다. “당시 UN이나 비동맹회의가 있기 3~4개월전부터 우리나 북한은 개발도상국 회원들을 초청하기에 바빴다.

    물론 초청하는데서부터도 쉽지 않은 로비 신경전을 벌였다. 초청 명단에는 해당 위원의 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딸과 사위까지 일가족모두를 불러 들였다. 특급호텔 VIP룸에서 온갖 선물과 향응이 주어졌다. 여자와 술, 여비는 기본이고 심지어는 명예 훈장과 박사 학위까지 수여하곤 했다”고 이 원장은 말했다. “너무 사소한 일까지 맡아서 해야 할 때는 ‘적어도 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사인데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혼자 다짐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코리아게이트’는 로비ABC 몰라 생긴일



    이 원장은 75년 UN 총회를 앞두고 벌인 에콰도르 사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UN총회에 앞서 페루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서 북한은 정회원 자격을 획득한 반면 남한은 탈락하는 비운을 맛본다. 우리나라로서는 UN 총회를 앞두고 최악의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비동맹회원국들을 등에 업은 북한이 UN 총회에서 일대 반격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 원장은 비동맹국인 에콰도르가 북한쪽으로 선회하다는 첩보를 받았다. 당시 코스타리카 대사 대리였던 이 원장은 에콰도르 대통령과 외무장관을 만났으나 기류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자칫 잘못했다가 낭패를 볼 것 같은 생각에 서둘러 UN담당 실무 국장인 페레스 안다의 집을 무작정 찾아 갔다.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각. 평소 그의 부인과도 이웃처럼 친하게 지내며 우정을 쌓아왔던 사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간 것이다.

    이 원장은 잠옷을 입고나온 페레스 국장을 새벽녘까지 설득하는 작업을 펼쳤다. 윗선의 의중을 파악했는지 처음에 꽁무니를 빼던 페레스는 결국 이 원장에 굴복, 한국 지지로 돌아섰다. 결국 그해 UN총회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지지표가 동수로 나왔다.

    만약 이 원장이 아니었다면 남한이 북한에 지는 사태가 일어날 뻔 한 것이다.

    “외교나 로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소 신뢰와 친분을 쌓는 것이다. 서로 특별한 이해 관계가 없을 때 인간적인 믿음와 교류를 터놓으면 결정적인 때 힘들이지 않게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다. 일이 터졌을 때 허겁지겁 하려면 먼저 의심을 받게된다. 그러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할 뿐아니라 그 효과도 신통치 않다. 그것이 로비의 세계다. 한국이 70년대 중반 ‘코리아 게이트’같은 불미스런 사태를 몰고온 것도 바로 이런 로비의 ABC를 몰랐던 까닭이다.”





    2002년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어‘결실’



    이원장의 로비력은 93년말 공직을 떠나고서도 빛을 발했다. 94년은 한국과 일본이 2002년 월드컵 유치를 놓고 사활을 건 전쟁을 펼치던 시절. 당시 한국은 뒤늦게 유치 경쟁에 뛰어 들어 전반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특히 세계축구계의 대부격인 아벨란제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공개적으로 일본을 지지하고 나서 한국으로선 힘든 상황에 놓여있었다. 일본은 브라질과 100년여의 수교 역사를 가진 동맹국으로 매년 브라질에 경제적으로 엄청난 원조를 해주고 있었다. 브라질 출신인 아벨란제가 일본을 지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월드컵 유치위 집행위원이었던 이 원장은 대세가 불리하다고 인식, 특유의 정공법을 시도했다. 그리고 95년 8월 에콰도르에서 벌어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기간중 정몽준 대한축구협회회장과 함께 남미로 날아갔다.

    그리고 대회기간중 정회장과 함께 한국 유치의 최대 걸림돌인 아벨란제가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가 담판을 시도했다. 한국측에서 정회장과 이 원장, FIFA측에는 아벨란제회장과 사무총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이 원장은 달변인 스페인어로 아벨란제에게 “세계축구를 관장하는 FIFA의 생명은 공정성 게임(Fair Play)이다. 당신의 모국 브라질이 일본과 가깝다고 해서 일본만을 편드는 것은 불공정한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그러자 아벨란제는 “한나라의 대사가 이래도 되는 것이냐”며 책상을 치며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결국 장시간의 대화 끝에 아벨란제는 정몽준회장이 유럽측의 차기 FIFA회장 후보인 요한손을 지지했던 것을 겨냥해 “지금부터 내 입장을 따라 준다면 당신들의 입장도 고려하겠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이끌어 냈다.

    이때부터 아벨란제는 공개석상에서는 일본편을 들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이듬해 6월 최종 유치결정에서 초반 열세를 뒤집고 한국이 일본과 월드컵 공동 개최권을 따내는 결실을 맺는 큰 초석이 됐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중남미를 상대로한 정부와 기업들의 협조 요청을 받고 있는 이 원장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매일 나무를 가꾸는 정성을 가지고 상호 신뢰를 쌓아가는데 달려 있다”며 초겨울에도 손수 박물관 정원수를 다듬으면서 생긴 군살이 박힌 손마디를 펴 보였다.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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