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해적] 동남아 바닷길은 해적들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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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12.07 19:00:00


  • 그녀는 매일 아침 큰딸(고2)과 작은딸(초등5)을 학교에 보낸 뒤 부산 부평동 시장에 있는 자신의 속옷가게로 향한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무척이나 무겁다. 김매자(45)씨. 외항선원인 남편과 떨어져 사는데는 습관이 됐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남편 얼굴을 못본지가 14개월이 넘었다.

    김씨는 해적 피해자다. 지난해 9월28일 동남아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에 피습된 ‘텐유’호의 기관장 박하준(당시 46)씨가 남편이다. 그녀는 아직 남편의 생사를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오시겠지…. 돌아오신다는 기대만으로 하루하루를 삽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장사를 하고 있지만, 막막하기만 하고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남편의 생사만이라도 알아 달라고 청와대에도 탄원서를 보냈고, 일본인 선주한테도 애원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그녀에게는 동병상련의 언니가 생겼다. 경남 양산에 살고 있는 이진숙(46)씨다. 이씨의 남편은 텐유호의 선장이었던 신영주(당시 53)씨다. 김씨와 이씨는 서로를 가리켜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사이”라며 울먹인다. 선주로부터 보험금은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사람이 와야지 돈이 무슨 소용이냐”며 흐느꼈다.

    올 10월21일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발생한 일본 화물선 ‘아론드라 레인보’호 해적피습 사건은 이들에게 분노로 와 닿았다. 일본이 해상보안청 선박을 신속히 파견하고, 관련국들과 협력해 사건을 조기에 수습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자국민 안전을 위해 저렇게 발벗고 나서는 걸 보면 분노가 치밉니다. 해외에서 고생하며 달러를 벌어오는 사람들이 도대체 누굽니까?”





    한국의 생명선이 위협받는다



    동남아 해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뱃길이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시기에도 소설에서나 보던 해적들이 판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사이에 위치한 말라카 해협에서 동남아 해역, 남중국해를 잇는 해상수송로(SEA-LANE)는 한국에게는 생명선이다. 원유수급의 90%를 차지하는 중동지역으로부터의 유조선 뿐 아니라 유럽을 왕복하는 화물선, 상선이 이곳을 경유한다.

    폭 64㎞의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대형 선박은 하루 250여척. 이중 3분의 1이 유조선이다.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행위가 성행하는 이유는 선박들이 이곳을 지나는 동안 속도를 줄이기 때문. 해적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쾌속정 등을 이용해 배에 접근한 뒤 올라탄다.

    동남아 해역은 산호초를 비롯한 섬이 많아 해적들이 은신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지역에서 16세기부터 서양선박들을 대상으로 해적행위가 빈번히 이뤄졌던 것은 이같은 지형적 요인도 크다. 여기다 동남아 각국이 IMF로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잠재적 해적 지원자들이 늘어난 것도 동남아에서 해적이 창궐하는 배경 중 하나다.

    국제해사기구(IMO)에 따르면 90~98년 전세계적으로 1,259건의 해적사건이 신고됐다. 이중 580건이 동남아 해역에서 발생했다. 해적들은 선박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선종이 일반화물선으로 232척이다. 이어 선적화물선(201척), 유조선(195척), 컨테이너선(159척)이 주요 습격대상이었다. 올들어 9월말까지 해적사건은 180건. 이 가운데 3분의 1 이상인 66건이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일어났다.





    해적수법 날로 대담·정교·첨단화



    한국 국적선도 피해를 입었다. 93년 1건, 94년 2건, 지난해 3건 등 90년대 들어 6척이 해적에 당했다. 관계자들은 “알려지지 않은 피해까지 감안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적피습이 공개되면 선박회사의 대외신인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즉시 신고해 수사가 진행될 경우 선박운항이 장기간 지체되기 때문에 선사들이 공개를 꺼린다는 것.

    해적의 수법도 날로 대담·정교해지고 있다. IMO에 따르면 최근 해적은 행동대, 장물취급자, 정부관리에 이르는 커넥션을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 해적들이 선박의 화물내역을 사전에 알아내 대상을 고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적들이 사용하는 무기도 총, 로켓포, 지구위치탐지기(GPS), 휴대용 이리듐 전화기로 첨단화했다.

    해적들은 선원들을 위협해 현금과 물품을 강탈하기도 하지만 아예 화물과 배를 통째 접수하기도 한다. 화물은 다국적 장물아비를 통해 내다팔고, 배는 이름을 바꿔달고 버젓이 해적선으로 재활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과정에서는 기관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장물처리와 선박의 허위등록은 불법을 눈감아 줄 배경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적에 탈취돼 이름이 바뀌어 버린 선박은 일명 ‘유령선’으로 불린다. 텐유호가 ‘산에이1’로 아론드라 레인보호가 ‘메가 라마’호로 이름을 바꿔달고 나다닌 게 대표적인 예다.





    화물·배 강탈, 선원살해도 빈번



    해적들은 단순히 화물과 배를 강탈하는데 그치지 않고 선원들을 바다로 내몰거나 살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IMO에 따르면 91~98년 전세계적으로 선원 173명이 해적에 의해 살해됐으며, 인질로 잡힌 선원도 1,238명에 이른다. 지난해 12월 대만 해역에서 해적에 피습된 ‘청손’호 선원 23명이 몰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희생된 선원중 7명이 남중해에서 어선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이중 한명은 총탄자국이 있었지만 나머지는 산채로 수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해적행위에 대해 동남아 각국과 국제기구들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3개국 정부는 97년 공동으로 해양경찰을 창설해 감시에 나섰다. IMO도 콸라룸푸르와 싱가포르에 해사처를 두고 신고센터와 위성방송기지 등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해적들의 주무대가 공해상이라 방지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어 IMO도 고민이다. IMO는 92년 해적들의 조직과 근거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 10개국 전문가들로 구성된 특수조사팀을 운영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현재 한국이 보유중인 국적선은 모두 394척. 정규 선원은 8,000여명에 이른다. 이중 동남아 지역을 통과하는 정기선은 57척. 운항회수로 따지면 위험에 노출된 배는 몇배로 늘어난다. 물론 외국배를 빌려 한국 화물을 운반하는 경우는 제외한 것이다. 동남아 지역에서 해적에 피습된 선박 중 유조선이 3위를 차지했다는 점은 또다른 시사점을 던진다.

    바다는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다. 따라서 자유통항과 자유통항 보장은 세계경제 발전의 전제조건 중 하나다. 동남아 해적 문제는 21세기 신해양 시대에 새로운 골칫거리를 던지고 있다.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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