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인간탐구] '번개 철가방'에서 스타 강사된 조태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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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12.07 19:22:00


  • ‘번개’ 강사 조태훈(30)을 만나려면 번개같아야 한다. 고려대 앞의 명물 ‘철가방 번개’에서 철가방을 내려놓은지 약 3년.

    이제는 하루에도 몇군데씩 전국을 무대로 초청강연을 다니는, 더 바쁜 몸이라 그와의 약속잡기가 인기가수 섭외만큼 고달프다. 게다가 두가지 본업까지 더 있다. 전국 23개 체인망을 가진 번개반점 사장이자, 이름도 기나긴 번개외식경영컨설팅연구소 소장. 스케줄을 관리하는 직원이 별도로 필요할만큼 그는 명실상부한 스타강사로 요즘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돈을 많이 벌고 못 벌고를 떠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겐 큰 재산입니다.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고 그들 앞에서 얘기를 들려줄 수 있다니 농담삼아 우리 가족들끼리 ‘이건 족보를 다시 써야되는 일’이라고 말하지요.”

    그를 찾는 이들은 환경미화원에서부터 학생, 일반 직장인, 공무원 등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 최근엔 장관님앞에서도 강연해 봤다. 비록 검정고시출신 중졸학력에다 직장경력이라곤 총 12년에 걸친 중국집 배달부 경험밖에 없지만 어디서도 그 때문에 강연중 주눅 들어본 일은 없다.





    “철가방 12년에 능구렁이·뺀질이 다됐어요”



    “배짱이 겁나게 좋거든요. 원래는 내성적이고 소심했는데 철가방 노릇 하면서 워낙 별별 사람을 다 만나다보니 능구렁이에다 뺀질이가 다 됐습니다. 그래도 저보다 잘 난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자면 위축되지 않냐구요? 전혀 아닙니다. 얼마전엔 한 경제연구소의 박사들 앞에서 강연할 때도 아무렇지 않았고, 내일도 의사들을 대상으로 강연이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아무리 자장면 배달엔 전문가인 저라도 대신 의사를 하라면 못하는 것처럼 그 의사들도 자장면 배달을 하라고 하면 못할거 아녜요. 자신감만 있으면 어디에 있든 창피하거나 떨릴 일이 없습니다.”

    특히 올해는 자장면붐까지 불어 더욱더 사기충천한 그다. 강연중 빼놓지 않는 그 특유의 사투리 버전, 자장면 예찬 한 토막.

    “제가 자장면업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보세요, 최근엔 자장면 영화

    까지 두 편이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얼마전엔 자장면 만화도 나왔더랑께요. 그뿐입니까, 자장면 노래도 나왔다 이말입니다.”

    강연내용은 주로 철가방 시절의 경험담이 대부분이다. 수시로 최근의 업계 동향이나 다른 양념용 이야기까지 덧붙여 변화를 주는 조씨지만 설령 해묵은 얘기만 되풀이한다해도 솔깃할만큼 그의 강연은 재미있다.

    특히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96년 고려대 ‘번개’시절의 얘기는 가히 신화적이다. 당시 고려대 학생들 사이엔 ‘번개에게 자장면을 시키고 담뱃불을 붙이지 말라’는 말이 돌만큼 유명했던 것이 그의 ‘총알같은 번개배달’. 그러나 알고보면 엉뚱한 배달사고에서 비롯된 전화위복의 해프닝이다.





    ‘번개’로 태어난 엉뚱한 배달사고



    “실은 원래 독문과 사무실에서 시킨 자장면을 잘못해서 학생실로 가져갔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없길래 마침 갖고 있던 핸드폰으로 주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다시 독문과 사무실로 가기엔 너무 거리가 멀다고 차라리 바로 옆방에 있는 심리학과 학생실로 대신 갖다주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별 생각없이 곧바로 그 방에 들어가 자장면을 꺼내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거기 있는 학생들 모두 갑자기 얼이 빠진 사람처럼 저만 쳐다보는 겁니다.

    알고보니 제가 들어서기 몇초전에 한 명이 주문하러 공중전화에 나갔는데 채 그 학생이 돌아오기도 전에 제가 자장면을 갖고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더니 그날로 바로 ‘번개’라고 소문이 퍼져버리더라구요. 나중엔 배달가는 곳마다 ‘어떻게 그리 빨리 왔냐’고 물어봤지만, 저는 죽어도 안가르쳐줬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 이후의 그의 행동이다. 오히려 한 술 더 떴다. 소문에 약한 군중심리를 확인한 이상 학생들이 많이 모인 곳엔 그 뒤 만사 제쳐두고 0순위로 달려갔다. 번개의 전설을 더욱 확실히 다져둔 것이다.

    행색도 바꿨다. 상대가 학생들이라 더욱 마음 편안한 상태에서 끼가 발동한 그는 선글라스에 해병대 군복차림, ‘번개’라고 새긴 소형 플래카드에다 빨간 삼각깃발까지 휘장처럼 휘날리며 일대를 누볐다. 급기야 시위대를 흉내낸 빨간 글씨의 머리띠까지 두르고 나섰을 땐 웬만하면 웃으며 봐주던 주인까지 나서서 처음으로 뜯어말릴 정도.





    튀는 자장면 배달, 안암동 명물로



    인사 하나도 남달랐다. 자장면 한 그릇을 갖다줘도 그는 다른 배달원과 달랐다. 만나는 학생들에게 “수강신청은 했나? MT는 어디 다녀왔나? 이번 시위때 아무개가 붙들려갔다는데 면회는 가봤나?” 류의 질문을 던지는건 기본.

    한문학과에 가면 ‘하루라도 짜장면을 안 먹으면 죽는다’를 4자성어로 해보라는 퀴즈를 내고 탕수육을 상품으로 거는가 하면 철학과에 가서는 “왜 제군은 짜장면을 시켰을까? 왜 인간은 배가 고플 수 밖에 없는걸까?”등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퍼부어대며 학생들과 가까워졌다. 그외에도 뭔가 ‘꺼리’만 보이면 당장 자신의 일에 써먹었다.

    한때 한보비리로 온 사회가 들썩거릴 때도 ‘철가방 번개가 고려대 모 교수로부터 800원 상당의 뇌물을 받고 그에 대한 대가로 타 교수실보다 먼저 배달을 해주는 등의 특혜를 베푼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는 등 신문기사를 패러디 해 대자보를 붙인적도 있다.

    그렇게해서 순식간에 안암동의 명물로 급부상, 고연전때도 초청을 받아 식전행사때 오토바이를 타고 운동장을 한바퀴 사열하듯 돌며 고대생들의 연호를 받은, 감격의 기억도 있다.

    “하지만 한편에선 주위의 눈총도 많이 받았습니다. 같은 식당에 있는 한 종업원도 어느날인가 갑자기 저를 부르더니 ‘너, 사장이랑 뭐 되냐? 아니면 월급이라도 더 받냐?’고 묻는 겁니다. 둘 다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왜 지랄이냐’며 욕을 하더군요. 보기싫다는 거죠. 하지만 지금도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남들이 내 일을 어떻게 보든 나는 그저 내 일을 하는 겁니다. 최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내게 주어진 내 일이니까 누가 뭐라든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는거죠.”





    어둡고 우울한 어린시절, 철가방들고 서울생활시작



    그처럼 적극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은 원래부터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성장과정의 얘기는 오히려 어둡고 우울하기만 하다. 어려서부터 내내 주위의 눈을 의식하며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5세때 어머니가 재가, 아버지 역시 새어머니를 맞았고, 그는 어릴적부터 할머니와 둘이서 살았다.

    그러다 17세때 서울에만 가면 뭔가 일자리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무작정 친구와 함께 고향 광주에서 가출했고 그 뒤 20대 초반때 아버지와 할머니마저 차례로 돌아가신 뒤엔 그나마 되돌아 갈 가족도 없이 혼자 세상에 남았다.

    내성적이고 상처 잘 받기는 철가방을 든 초기에도 여전했다. 명동에서 시작한 첫 배달원 시절, 아직 철가방을 드는 요령조차 몰라 길을 걸으며 국물을 다 흘린 뒤 한 노점상에게 우동을 갖다줬다가 된통 야단을 맞은 첫날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 찾아간 한 미용실에서의 실수. 시골출신으로선 생전 처음 보는 대형 미용실이라 배달후 출구를 찾는다 는 것이 그만 마사지실의 문을 잘못 열어 마침 옷을 갈아입던 아주머니를 훔쳐 본 꼴이 된 것. 즉석에서 뺨을 맞고 항의를 듣는등 곤욕을 치렀다.

    그렇게 버틴 것이 명동에서 6년, 을지로에서 3년. 그간에 번 월급을 일껏 저축해 모은 2,800만원을 하루아침에 날려보기도 했다. 큰맘먹고 장사를 해 볼 생각으로 친척에게 투자했다가 부도를 당한 것. 오히려 빚까지 떠안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몇 달간의 방황.

    “건설현장의 막노동도 해보고, 다른 음식점 종업원 노릇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적응이 안되어 거의 사나흘 간격으로 계속 옮겨 다니는 식이었습니다. 한식은 왜 그리 반찬 가짓수가 많은지, 9년동안 반찬 한가지짜리 중식만 배달하다가 그걸 해보니 도저히 안되겠더라구요. 또 맥주집 서빙을 할땐 허구한 날 주정에다 행패 때문에 힘들어서 결국 이래저래 몇 달만에 그만뒀지요.”





    강사에 사업가로... 진짜승부는 이제부터

    그래서 돌아왔다. 안암동 번개로. 그리고 가장 신나고 중요한 시기를 보낸뒤 현재의 번개까지 오른 것이다.

    “사실 자장면 배달도 우습게 볼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일종의 영업이지요, 하다못해 유치장에서부터 장관실까지 철가방이 배달 안 가는데가 없어요. 처음엔 저도 잠깐 해서 돈 모으면 다른 일 하려고 했는데 막상 이 일을 계속 하다가보니 차라리 잘 모르는 다른 장사를 하느니 이것을 잘 배워 나중에 내 음식점을 차리는 게 좋겠다 싶어진 겁니다. 그래서 제 꿈도 ‘앞으로 대한민국 어디에 가도 내 간판이 보이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진짜 1년만에 해냈쟎아요. 그저 자신감 하나로 이 모든 걸 얻은거지요.”

    철가방 시절에 비하면 확실히 일취월장한 그다. 현재 강연수입만해도 철가방 시절의 4배 이상. 외식경영컨설팅연구소엔 직원 4명이 그의 휘하에 있다.

    오랫동안 가족없이 살아야 했던 외로움도 이제는 자신의 가정을 꾸미면서 떨쳐낼 수 있게 됐다. 작년에 결혼한 그는 어린 아들을 둔 어엿한 가장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인기를 얻는만큼 치러야되는 대가도 있다. 그토록 소망했던 번개반점을 작년에 처음 명동에서 열었을 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도 한달 평균 200만원의 적자를 보다가 결국 작전을 바꿔 원당으로 위치를 옮겨버렸다.

    서비스로 소문난 번개의 첫 작품인만큼 각종 메뉴며 서비스를 획기적으로 차별화했지만, 이미 기대치가 상승할대로 상승한 채 그를 찾은 손님들에겐 잘해봐야 ‘당연한 대접’, 그렇지않으면 ‘별 것 아니다’라는 시큰둥한 반응뿐이었던 것. 고추장 소스 돈까스나 김치자장, 자장면 빨리 먹기대회와 같은 아이디어 상품만 숱하게 터뜨려 놓은채 번개의 유명세만 톡톡히 치른 경험이었다.

    그러나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일 것이다. 강연장에 들어서도 맨먼저 상대의 속부터 재빨리 간파, 강연 시작후 첫 세마디 안에 승부를 낸다는 조씨. 최근엔 번개외식경영컨설팅연구소의 본부도 서울에서 대구로 옮겨놓고 ‘맛의 취약지대’로 소문난 대구를 본격적으로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번개판 신장개업이 한 판 벌어지는건 아닐까.

    “앞으로도 자장면 장사 열심히 잘하고, 가능하다면 체인점도 많이 늘어서 사업이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또 한가지, 요즘은 못다한 공부를 다시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전엔 고대생들에게 배달을 다녀도 그들이 부럽다거나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조금씩 생각이 바뀝니다.

    이 자리에 계속 서려면 역시 더 많이 알아야겠구나 싶습니다. 여건이 허락되는대로 경영학을 공부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정해진 목표치는 없습니다. 무엇이든 숫자로 정해놓으면 꼭 쫓기게 돼 있더라구요. 그냥 언젠가는 되겠지, 설마 나이 50안엔 못 되겠나 그렇게 편하게 마음먹고 긍정적으로 삽니다. 제가 별명은 번개라도 덜렁대거나 조급하지는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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