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몽골기행] 다소곳이 내려앉은 100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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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12.08 10:19:00


  • 제주도와 몽골은 언제부터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역사의 징검다리를 건너 거슬러 올라가면 실로 720여년 전 일이다.

    몽골에 사신을 파견할 때 탐라 성주를 동행케 한 것은 1266년의 일이고,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하여 김방경 등이 제주에 들어온 것은 1273년이다. 제주가 고려에 귀속된 것이 1376년이니, 어디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족히 100년이나 된다. 사람으로 치면 3대에 거친 기간이니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게 많이 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목축업에 따른 유목 문화다. 1276년 다루가치를 파견하면서 말 160필을 가지고 와 수산평(지금의 성산읍 수산리)에 방목했다.

    이때부터 낙인을 찍는 법, 호흡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말의 콧구멍을 찢은 일을 비롯하여 소와 말을 이용한 밭 밟기·밭갈이·남태(땅을 다지는 나무로 만든 도구. 만일 돌로 만들었으면 돌태라 한다)끌기·마차 끌기·연자매 돌리기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소의 털이나 가죽을 이용하여 탕건과 망건 겯기 그리고, 가죽옷 만들기 등은 모두 목축업이 들어옴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일을 최초의 방목지가 수산평이라는 데 있고, 이 일대에서만 피뿌리풀이 자란다는 사실이다.

    피뿌리풀은 몽골에서는 지천으로 피는 꽃이다. 동물의 상처 치료제로 쓰인다는 이 풀은 몽골어로 ‘70개의 머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 뿌리가 핏빛처럼 붉다는 데서 듣기에 거북하고 좀 어색한 이름을 얻었다.

    ‘대한식물도감’(이창복 편)에 의하면 이 꽃은 한라산 동쪽과 황해도 이북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 사실은 제주도가 몽골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지 않은가 한다.





    몽골어 차용많은 제주사투리



    또 동물 특히 마소의 똥을 이용하여 연료로 쓰는 것도 몽골의 영향이다. 몽골에서는 여름이 지나면서 틈틈이 마소의 배설물을 말리어 쌓아두었다 겨울을 난다. 제주도에서도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몽골과 마찬가지로 마소의 배설물을 모아 말려 두었다가 연료로 썼다. 화력이 좋고 연기도 없다. 오래 타니 이 이상 더 좋은 연료는 없을 것이다.

    제주어에 몽골어 차용이 많은 것도 그 영향에서 비롯한다. 말의 색깔에 따라 검은 털을 가지고 있으면 가라말이라 하고, 붉은 털이면 적다말이라고 한다.

    또 말에 쓰이는 도구 이름도 몽골어 차용이 많은데, 안장 밑에 까는 깔개를 ‘도곰’이라 하고, 안장을 고정시키는 끈을 ‘오랑’이라 한다. 입 언저리와 머리에 매는 끈을 ‘가달’이나 ‘녹대’라고 하기도 하는데, 구레나룻을 제주도에서는 ‘녹대수염’이라 하는 데서 분명히 알 수 있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거친 일본 정벌의 실패는 몽골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며 이후 일본 침입이 두려워 제주도 곳곳에 봉수대를 설치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삼별초가 제주도에 들어와 외세와 대항하기 위해 진지를 구축한 것이 지금의 항파두리 토성이다. 이름도 특이한 데서(이 전쟁에서 승리한 홍다구 장군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땅이름이다) 몽골과의 관계를 알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인 김통정과 김방경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과의 격전지가 바로 이 곳이다.

    또 이 토성 바로 옆에 있는 갈구미내에는 ‘장군물’이라는 돌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있는데 김통정 장군이 뛰어내린 발자국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기도 한데 모두 몽골과 관계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항몽순의비를 세워 외세에 대항했던 선인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분위기·생김새 비슷



    제주시 삼양 1동에 위치한 원당불탑사 5층 석탑도 몽골과 관계가 깊다. 이 탑이 ‘원당봉’이라는 오름에 있고, 여기에 기황후 전설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이 절에 얽힌 전설은 대충 이러하다.

    공녀로 끌려간 기씨가 황제의 총애를 입어 제2 황후가 되고, 황후가 되고 난 후 제일 먼저 마음을 썼던 것은 태자를 낳는 일이었다. 북두성 명맥이 비치는 동쪽 바닷가 3첩 7봉을 찾아 절을 짓고 기도하면 소원을 이루리라는 도사의 말을 믿고 풍수사를 원이 지배하고 있는 각처로 보내어 찾던 중 탐라의 해안 곧 지금의 원당봉이 3첩 7봉임을 알아 이곳에 불사를 일으키어 기도한 결과 태자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 절에는 5층 석탑이 서 있는데, 축조 양식이 고려식이고 기단에 안상 무늬가 새겨져 있다.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아 1971년 지방 유형문화재 제 1호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국보로 지정·보호받고 있다.

    누가 무어라 해도 제주도와 몽골과의 관계를 깊다. 자연의 분위기가 그렇고 사람 생김새가 더 그렇다. 제주 사람이 몽골에 가 몽골어만 잘 한다면 몽골 사람이 되어 시골서 올라온 몽골 사람이 길을 물어볼 게 틀림없다. 그런 경험을 몇 번 겪은 바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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