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인간탐구] 노래하는 택시기사 '스와니 림' 임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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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0.06.28 15:34:21 | 수정시간 : 2000.06.28 15:34:21
  • [인간탐구] 노래하는 택시기사 '스와니 림' 임승완



    지난 6월 21일 오후. 한적한 삼청공원 부근에서 한 택시가 자가용의 범퍼를 박았다. 경미한 접촉사고. 4년차 택시기사 임승완(47)씨의 실수였다. 그는 우리가 만나려던 사람이었다.

    공자 성격도 바꾼다는 게 운전시비지만 차후 문제를 위해 명함까지 건네주고 왔다는 그는 낯빛 하나 굳지 않았다. 단순히 기다리는 사람들을 불편치 않게 하려는 배려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선물해줬다는 스누피 넥타이를 휘날리며, 인생 전부가 재미있지 않냐고 웃는다.

    “오늘 얼마나 더 좋은 일이 생기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다음에 뭔가 열배, 스무배 더 좋은 행운이 생기려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오히려 다음 일이 기대되는 걸요!”

    임씨의 눈엔 세상에 재미없는 일이 단 한가지도 없다. 더우면 더운대로 신나고 차가 밀리면 밀리는 대로 즐겁다. 세상이 주는 고통에는 분명히 그 응분의 ‘사례’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황이었던 IMF 한파때도 그의 승객은 넘치고 넘쳤다. 항상 즐거운 마음만 가지면 나쁜 일도 좋은 복을 몰고 오더란 것이 그의 경험상 지론이다. 때때로 승객과 시비가 붙거나 심심찮게 차안을 오물로 어질러 놓는 취객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날에도 그는 태연히 콧노래가 나온다. “또 얼마나 큰 복이 찾아오려고!”




    자작곡만 300여곡, 22번째 음반 준비



    그는 본명보다 예명을 좋아한다. 노래하는 택시기사 ‘스와니 림’으로 불리길 원한다. 직접 노래도 부르고 작사 작곡도 한다. 지금까지 발표한 자작곡만 300여곡. 최근에도 신곡을 냈다.

    ‘평화의 이름으로 통일의 이름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하루전 만든 노래다. 하루 12시간 교대근무중에도 뭔가 떠오른다 싶으면 수시로 정차, 악보를 그린다. 작곡뿐 아니라 인쇄도, 홍보도 직접 한다. 식당이든 공원이든 사람들이 모인 곳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자기 소개가 실린 악보전단지도 나눠주고 즉석 공연도 한다.

    그러기를 약 15년. 음악경력이 택시기사 경력보다도 네배나 더 길다. 원래 자기사업을 하던 그가 택시 운전대를 잡게 된 것도 알고보면 그 ‘돈 안되는 음악’ 때문이다. 포부 또한 국제급이다.

    “이번 22번째 음반은 국내 굴지의 모 음반회사에서 펴냅니다. 제 돈이 들어가긴 하지만 대단히 파격적인 조건입니다. 이번엔 확실히 뜰거예요. 중국어, 일어를 비롯해 전 세계 10여개국어로도 번역해 부를 준비중입니다. 일단 뜨기만 하면 조성모도 부럽지 않을 겁니다. 특히 사상 유례없는 ‘노래하는 택시’만 곧 가동되면 내년중엔 세계의 토픽감으로도 올라갈겁니다. 반드시 이뤄진다니까요.”

    ‘'노래하는 택시’란 벤츠와 같은 약 1억원대 최고급 차량에다 최고급 오디오시설을 갖추고 가수가 운행한다는, 임씨의 독특한 사업구상이다. 자기 생활비라면 1억은 커녕 석달안에 500만원 만들기도 불가능한 그지만, 노래에 관해선 얘기가 다르다.

    이미 몇몇 기업가와 접촉, 잘하면 곧 몇천만원을 지원받을것도 같다. 희망차량의 견적까지 뽑아두었다. 어떤 택시를 누가 어떤 식으로 굴릴 것인지 세부운영 사항도 조목조목 짜두었다. 생각만 떠오르면 도무지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행동파. 임씨가 말하는 임씨 인생의 주된 동력이다.




    간발의 차로 뒤바뀌는 인생



    언제나 간발의 차로 뒤바뀌는 인생. 일이 꼬이기로 치면 임씨만큼 사연 많은 풍운아도 흔치 않다. 고향은 충남 보령. 서울로 들어선 첫발부터 시련의 시작이었다.

    시골학교라곤 하지만 단 한번을 빼고는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던 우등생 임씨. 중학교에서도 수석 입학, 수석 졸업 기록을 세웠던 그는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명문 K고에 입학하기 위해 설레는 상경길에 올랐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어이없는 변을 당했다. 버스표를 사려던 그에게 한 40대 신사가 다가와 짐을 맡아주겠다며 친절을 베풀었다. 당시 갖고 있던 짐은 생활비 50만원을 감춰둔 이불보따리와 책가방 두 개. 매표소까지 거리가 고작 5미터나 되었을까. 돌아와보니 짐도 사람도 깜쪽같이 사라졌다. 절도범에게 당한 것이었다.

    이리저리 헌 교과서를 빌리고 얻어 겨우 K고 입시를 치렀다. 마지막 관문인 체력시험을 보던 날 아침, 하필 몇십년만의 폭설로 온 도로가 마비됐다.

    급한 마음에 도중에 버스에서 내려 물어물어 뛰어가면서까지 학교에 갔지만 이미 입실시간 초과. 교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순진한 시골소년은 감히 두드려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서 왔다.

    자포자기 상태로 몇 달을 보냈다. 우등생으로 꿈도 컸던 그에겐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얼마 뒤 서울로 모두 이사온 가족과도 곧잘 충돌을 일으켰다. 어느날 부모의 꾸지람 끝에 농약을 마시고 죽어버리겠다며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산에 올랐다가 그는 발아래 드넓은 서울땅을 보았다.

    “저 넓은 서울안에서 설마 내가 할 일이 없겠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이젠 내 스스로 할 일을 찾아보자. 그 어린 나이로 가장 하기 쉬운 건 신문배달이었는데 그것도 이왕이면 중앙청 제일 가까운데서 하는게 좋겠다 싶어 한 신문사 광화문 보급소에서 일하게 됐지요.

    석달만에 그 안에서 최고 실적을 올렸습니다. 요즘 돈으로 한달에 70만원쯤 벌었을까, 나중엔 동생도 데리고와서 같이 먹고 자고 일하면서 공부를 시켰지요.”

    신문배달 3년후 볼링장의 핀세터로도 2년쯤 일했다. 그리고 군입대영장을 받고 기다리던 중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때까지 평범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옆집 신학생의 끈질긴 권유로 몇년만에 부흥회에 나갔다가 갑자기 ‘심장부근이 뜨끈해지는’, 소위 ‘성령체험’을 한 것.

    이후 독실한 기독교도로 변한 그는 3개월간 성신신학교에서 청강, 군입대후에도 군종사병으로 복무했다.

    제대후라고 뾰족히 기다리는 미래도 없었다. 낮에는 일당 2,500원의 막노동판에서 일하고 저녁엔 신학공부, 한시간쯤 자고 일어난뒤 다시 한밤중 시장에 나가 리어커로 쓰레기를 실어날랐다. 그 일이 끝나는 새벽 3~4시 무렵이면 다시 교회의 새벽기도실로 직행, 새벽내내 기도를 올리고 집에 들어와 잠깐 선잠을 자고는 다시 노동판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한동안 떡장사에도 나섰다가 우연히 만난 한 영업팀장의 권유로 세일즈를 시작했다. 영어학습교재를 파는 일이었다. 오래지 않아 팀내 최고의 영업실적을 기록, 벌이도 좋았다.

    어느정도 자신이 붙었을 때 동생 돈 280만원을 밑천으로 3,300만원짜리 집을 사 세를 놓았다가 3년만에 집을 날릴 위기를 맞았다. 그 위기를 만회해보겠다며 되레 더 큰 사업을 벌였다.

    출판중개일이나 명함, 카탈로그 인쇄, 덤핑 생필품을 중개하는 일 등이었다. 사실상 무리수였다. 한때 자신이 개발한 금연관련 상품으로 서울 천호동과 신설동, 역삼동, 부천 4곳에 사무실과 음악작업실을 소유, 요즘 돈으로 월 1,000만원을 벌었던 전성기 6~7개월을 빼고는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삼양동 달동네나 성남 월셋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음악적 영감



    어렸을 때부터 10년 가까이 만성 축농증으로 고생, 음치였던 그가 갑자기 음악과 맺어진 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다. 1978년 어느날 눈이 오는 거리를 걷다 말고 뭔가 흥얼흥얼거리는 자신을 보았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멜로디였다.

    특별한 음악전문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그에게 갑자기 악상이 떠오른 것. 신기한 일이었다. 점점 많은 노래들이 수시로 그의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미처 악보로 남기지도 못했다. 악보를 그리는 법조차 그는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5년쯤 지나자 그 해답도 절로 나왔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나름대로 점으로라도 표시해보자’는 생각에 무작정 들고 있던 노트에 오선을 그은 뒤 암호처럼 자신의 노래를 점점이 찍어나갔다. 처음엔 실제 음과 다소 오차가 생기기도 했지만 횟수가 더하자 한결 나아졌다. 이렇다할 출처도 원칙도 없이 시작된 임씨의 ‘야생 음악’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정리되고 있다.

    한편으론 이것이 되레 화근이었다. 그나마 간신히 끌고가던 사업이 더 빨리 무너진 것도 자신의 작곡집을 출판하는데 적지않은 돈을 썼던 이유가 있다. 어렵게 출판 등록을 하고도 자신의 테이프이며 악보집만 몇가지 냈을뿐 이내 도산한 임씨.

    1994년 총 1억5,000만원의 부도와 함께 10개월 20일간의 수형생활을 치르기도 했다. “웬만큼 고생했다는 사람보다 최소한 10배 이상은 더 고생한 사람이 접니다. 형(刑)을 살면서 병을 얻어 수술도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밑바닥까지 갔을 때 그러나 제 마음은 오히려 담담해지고 새로운 희망이 솟았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으니 이젠 올라갈 일만 남았구나, 뭣보다 노래가 있었기에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노래하는 택시는 평생의 대업



    3번의 결혼과 3번의 이혼. 그리고 현재 혼자다. 팔순 노모와 함께 두 아들의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는 임씨. 그의 편집증적인 음악일이며 어려운 경제사정까지 함께 감싸 안아줄 동반자가 필요하지만 좀처럼 새 인연이 쉽지 않다.

    택시기사란 직업은 그에게 더없이 만족스럽다. 생업만 다를뿐 음반을 내고 작곡을 하는 일은 변함이 없다. 표정이 흐린 승객에겐 차분한 음악을, 즐거워보이는 승객에겐 경쾌한 곡을 틀어주는 등 선곡에도 세심한 택시기사. 날이 흐리건 맑건 항상 낯이 밝은 그에겐 불황도 없다.

    설령 그의 바램대로 곧 ‘세계적 화제의 인물’이 된다고 하더라도 운전대를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래하는 택시는 그가 꿈꾸는 평생 대업이므로.

    회사원도 아니면서 커다란 서류가방을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임씨. 그 가방안에 든 노트 한권을 펴자 그가 최근 만들어냈다는 또 한곡의 악보가 보인다. 제목은 돈키호테. 자신이 그려낸 자화상이다.

    곡은 총 2절, 각각 8줄의 가사로 이뤄져있는데 그 후렴구는 공히 동일하다. ‘최후의 승자는 돈키호테 그였다네’ 휘발유로 움직이는 산초를 몰고, 서울을 광야삼아 달리는, 노래하는 돈키호테. 오늘도 서울을 오가는 택시 수천, 수만대중 한 대에 그가 앉아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0/06/2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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