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찻그릇역사기행(15)] 강진(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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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0.07.04 16:39:42 | 수정시간 : 2000.07.04 16:39:42
  • [찻그릇역사기행(15)] 강진(中)

    강진은 이제 더이상 다산(茶山)의 한(恨)과 영랑의 정한(情恨)이 서린 유배의 고을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유적이 분포된 이곳은 해마다 계절을 떠나 경향각지에서 수십만의 인파가 찾는 남도 문화유적답사 1번지로서 당당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강진읍에서 강진만을 따라 시원하게 펼쳐진 23번 국도는 보통 사람들도 시정(詩情)이 절로 솟는 아름다운 길이다. 바다 위에 옹기종기 떠있는 전설같은 섬들, 어머님 품 같은 더 넓은 갯벌은 매마른 기행자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준다.

    지금은 어화(漁火)들이 사라진 구강포 앞바다를 따라 칠량면을 거치면 우리나라 청자문화의 메카인 대구면이 나온다. 이곳에는 사당리, 계율리, 용운리 등의 무려 180여개 가마터에서 9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세계적으로 찬란한 청자문화를 꽃피웠다.

    청자의 기원은 중국 한나라때 절강성 월주가마에서 원시적인 청자가 처음 제작되었으며 5∼6세기경부터 점차 발전되어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때 절정을 이루었다.

    서울의 백제 몽촌성과 석촌동 고분에서 4세기말 중국의 원시청자가 발굴되었고 공주의 무녕왕릉에서는 양질의 중국 청자 항아리 2점이 발굴되어 6세기초 활발했던 중국과의 청자문화 교류를 알 수 있게 한다.

    중국 청자문화의 변화는 9세기 안록산의 난 이후 전국이 참화를 겪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라의 왕자 김교각은 안록산의 난을 피해 수도 장안에서 사천성 성도(成都)로 몽진중인 당나라 현종을 호종하면서 전난의 비참함과 양귀비의 자살을 목격하고 세속의 절대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홀연히 신라에서 데리고 간 삽살개 한 마리와 함께 안휘성 구화산에 입산, 뼈를 깎는 고행 끝에 성도(成道)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는 몸을 더 낮은 데로 임하여 굶주림과 정신적으로 지쳐있는 당나라 민중을 식량과 차와 지장신앙을 바탕으로 온갖 기적과 무한구원을 행하였다.

    그러자 당나라 민중은 신라왕자 김교각을 지장왕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하였고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후 김 지장왕보살의 영향으로 절도사라고 불리우는 지방 호족세력 사이에 선종(禪宗)불교와 음차(飮茶)의식이 유행되었고 점차 당나라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동시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찻그릇의 수요도 늘어나 해무리굽 청자찻그릇의 보급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신라말 당나라로부터 유입된 선종불교는 수도 서라벌 중심의 궁정불교를 탈피하여 지방의 많은 호족세력의 정신세계와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선(禪)의 수행방법으로 좌선시 정신을 맑게 하는 음차(飮茶)의식은 선승들로 하여금 고급차와 월주요에서 구워진 해무리 청자찻그릇을 진중(珍重)하게 만들었다.

    그 예(例)로 경주 황룡사지와 안압지, 익산 미륵사지, 산청 단속사지 등에서 월주요에서 제작된 찻그릇 도편이 발견되었다.

    신라 말 장보고 장군에 의해 새롭게 도입된 청자하이테크는 이곳 강진군 대구면 일대의 가마터에서 우리 스타일의 새로운 해무리굽 청자찻그릇을 탄생시켰다. 우리나라 청자의 발생시기도 고려 초에서 신라말로 상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청자란 철분이 조금 섞인 태토로 기물을 성형한 후 800도에서 초벌구이를 거쳐 다시 철분이 1∼3% 정도 함유된 장석유(長石釉)를 바르고 1,250∼1,300도의 환원염으로 구워 태토 속의 철분과 유약 속의 철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청록색으로 나타나는 자기를 통칭한다.





    <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7/0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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