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피플파워에 무너진 '빈민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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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1.01.30 19:32:53 | 수정시간 : 2001.01.30 19:32:53
  • 피플파워에 무너진 '빈민의 영웅'

    에스트라다 대통령 사임, 새 대통령에 아로요



    필리핀 국민이 또다시 부정부패에 찌든 정권을 몰아냈다. 1986년 장기집권과 부정부패에 항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을 쫓아냈던 피플파워가 15년만에 다시 부활한 것이다.

    부정부패 혐의로 탄핵재판에 몰렸던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하고 글로리아 아로요 부통령이 대통령 취임선서를 시작한 1월20일 오후. 수만명의 시민으로 가득찬 수도 마닐라의 도심은 승리의 함성과 자동차의 경적소리로 뒤덮였고 새로운 희망을 기원하는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반(反)에스트라다 진영의 중심에 섰던 아로요는 힐라리오 다비데 대법원장 앞에서 "필리핀 대통령으로서 특권과 책임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취임선서를 했다.

    그는 이어 "국민 모두가 하나가 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며 단합을 거듭 강조했다.

    이 순간, 전날 폭음으로 초췌한 모습의 에스트라다는 시위대가 대통령궁으로 몰려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가족과 함께 말라카냥궁을 빠져나갔다.

    액션배우 출신인 그가 1998년 빈민 유권자의 강력한 지지로 예상을 깨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그 문을 들어섰던 신화는 초라하게 끝났다.

    에스트라다는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다. 가난한 사람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그는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 이권에 개입하고 뇌물을 받는 등 각종 부정부패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왔다.




    각종 부정부패로 몰락 자초



    취임 직후부터 잇단 섹스스캔들로 도마에 올랐던 에스트라다는 지난해 10월 친구인 루이스 싱손 일로코스수르주 주지사가 의회 청문회에서 불법 도박자로부터 뇌물을 받아 대통령과 그 친척에게 나눠줬다고 폭로하면서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에 분개한 야권과 시민단체는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다. 탄핵재판 과정에서 비리가 잇달아 폭로되면서 그의 운명은 풍전등화 신세로 전락했다.

    그의 혐의는 불법도박업자로부터 4억 페소(약 110억원)를 뇌물로 받은 것 외에 담배재배 농가용 영농자금 1억3,000만 페소와 복권판매 대금 4억3,030만 페소의 착복, 주가조작 개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와중에 아로요 부통령 등 에스트라다 정권의 핵심 인사가 하나둘씩 그를 떠나갔다.

    탄핵안이 하원을 통과하자 에스트라다는 16일 최종 결정권을 가진 상원으로 하여금 탄핵 검사들이 요청한 자신의 비밀계좌 추적을 거부케 했다. 11대10으로 부결된 투표결과로 그는 탄핵위기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하지만 분개한 야권과 시민은 의회 심판 대신 거리투쟁을 선택하면서 에스트라다의 계산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코라손 아키노 전대통령과 가톨릭 지도자 등 야권 인사를 필두로 10여만 명의 시민이 민주화 성지에 모여 '에스트라다 퇴진'촉구 시위를 벌이면서 전국 주요도시로 시위가 확산됐다.

    이같은 압력에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에스트라다는 자신이 직접 임명한 앙헬로 레예스 군참모총장이 19일 전격적으로 반에스트라다 진영에 합류하면서 급격히 무너졌다.

    에스트라다는 5월 조기 대선과 불출마 선언을 약속하면서 불명예퇴진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결국 다음날 대통령궁을 떠났다. 그는 현재 법무부에 의해 출국금지된 상태이며, 검찰은 그의 부정부패 혐의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에스트라다는 재판에서 혐의가 인정될 경우 법률상 최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아로요 새 대통령 손탄치 않을 앞날



    그러나 에스트라다의 몰락으로 필리핀의 정국이 당장 안정을 가져올 것 같지는 않다.

    에스트라다의 임기인 2004년 말까지 권력을 승계하게 된 아로요 대통령의 일천한 정치경험으로는 풀기 쉽지 않은 난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권력승계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기득권 세력의 거센 요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발등의 불로 대두했다. 에스트라다는 24일 아키리노 피멘텔 상원의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게 돼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토록 한다"고 밝혀 아로요의 대통령 취임을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에스트라다가 자신이 여전히 헌법상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에스트라다 진영에서는 5월 실시되는 상ㆍ하원 선거출마와 대통령직 회복 소송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같은 에스트라다의 공세는 사법처리를 피하기 위한 고도의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여기에다 아로요는 내각 구성부터 구설수에 휘말리는 등 시련을 겪고 있다. 시민혁명에서 그를 지지, 에스트라다 몰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올란도 메르카도 국방장관이 25일 부패스캔들로 물의를 빚은 리산드로 아바디아의 국가안보보좌관 임명에 반발, 사의를 표명했다.

    더욱이 임명된 10개 부서의 장관 중 7명을 아키노와 피델 라모스 전대통령, 심지어 에스트라다측의 인물로 채워 필리핀 내에서는 아로요의 개혁성에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기득권 세력 출신인 아로요가 시민혁명에 의해 집권했다는 사실을 잊을 경우 피플파워가 등을 돌릴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더욱 힘든 과제는 경제회복이다. 집권 후 증권시장이 폭등, 아로요 정부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지만 필리핀 경제가 워낙 악화해 있어 해결이 쉽지 않다. 금융 관계자들은 필리핀의 올해 평균 환율이 달러당 62.6페소, 내년엔 83페소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하면서 정치위기가 계속될 경우 내년엔 마이너스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권혁범 국제부 기자 hbkwon@hk.co.kr

    입력시간 2001/01/3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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