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인간탐구] 화술전문가 민영욱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플러스 네이버 북마크 싸이월드 공감 기사 구입 프린트 기사메일
입력시간 : 2001.01.30 20:03:33 | 수정시간 : 2001.01.30 20:03:33
  • [인간탐구] 화술전문가 민영욱

    "말에도 맛이 있고 멋이 있죠"

    "나이 때문에 발음이 좀 흐려지긴 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아주 논리적이고 명확한 스피치를 구사합니다.

    듣는 사람이 정확히 알아듣도록 꼭꼭 집어주는 형이지요. 김영삼 전대통령은 그 반댑니다. 상대가 듣든 말든 자신의 말만 주르륵 쏟고는 끝내는, 스피치의 본질로 보면 그다지 점수가 후한 유형은 아닙니다.

    김종필 명예총재는 말하자면 고수들끼리나 통할 만한 고급 스피치입니다. 상대에게 말을 던져놓기만 하고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들으라는 스타일이죠. 스케일은 큰 거죠.

    이회창 총재는 딱 학자스타일 스피치 그대로입니다. 딱딱하고 메마르지요. 스피치 자체로만 본다면 이인제 최고위원이 가장 표준형에 가깝습니다. 말의 강약이나 고저장단 등이 가장 균형있습니다."

    한국스피치&리더십센터 민영욱(38) 원장은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도 그의 말솜씨부터 귀에 걸리고, 매양 하는 일도 남 앞에서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화술(話術)전문가다.

    오래된 버릇 한가지도 광고문구 탐색하기. 그 기발한 단문에 마음이 빼앗겨 입속으로 그 말의 맛을 잘근잘근 씹어보다가 기어코 며칠 뒤엔 자신의 말 속에 녹여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상대를 감동시키는, 말의 맛을 즐기는 사람이다.

    "노력없이 되는 게 있겠습니까. 타고난 개그맨이라는 김국진도 '오 마이 갓' 그 유행어 하나를 만드는데 억양과 장단 등 거울앞에서 300번 연습해서 골라낸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술도 기술이지만 역시 그 마지막은 내용이지요."



    스프치훈련의 가장 좋은 선생은 '실수'



    화술로 강단에 선지 10여년. 예전엔 심리적인 언어장애로 찾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요즘은 생존경쟁의 플러스 알파를 얻기 위해 화술을 다듬는 이들이 많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입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은 물론, 멋진 말솜씨로 회의 때마다 졸았던 사원들을 한번 사로잡아보겠다는 회사 사장, 취업면접생, 선거철이면 특히 기초단체장들의 상담이 많다.

    한번은 모 경제신문 정치부기자도 방문. 지난 대선당시 후보들과의 대담을 맡게 돼 너무 긴장된다며 개인교습을 청한 것. 제스처, 표정, 발성, 자신감 등 그가 훈련시키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단 한마디로 말해 가장 좋은 선생은 실수를 많이 해보는 것.

    중요한 일을 앞둔 경우 가족이나 친구 앞에서 미리 예행연습을 여러번 해 보거나 그것을 비디오로 찍어 함께 모니터하라는 것이 그의 공통 추천사항이다. 자신이 보는 자신과 남에게 비치는 자신은 다를 수 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요? 주로 입 큰 사람들이 많지요. 하하."

    그리고 서글서글한 인상. 그러나 민 원장 자신은 입이 크지도, 인상이 서글서글한 편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너무 주눅 들고 말을 못해 오히려 이 길로 접어든 사연까지 있다.

    고생이라면 사무치도록 겪었다. 세 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아래 7남매의 막내로 자랐다. 나이 차가 많은 큰 형은 특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구구단을 외게 한 뒤 엎드려 뻗친 채 소나무 작대기가 부러져나가도록 그에게 매를 대곤 했다. 항상 형이 무서웠고, 그로 인해 언제나 주눅이 든 채 주변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소심한 소년이 됐다.

    책 읽기를 시키는 초등학교 국어시간은 특히 끔찍스러웠다. 어쩌다 호명당해 일어나면 너무나 가슴이 떨려 문장 한번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고 선생님은 '문맹'으로 오해해 방과후 나머지 공부까지 시켰다. 전남 해남, 온 동네가 스무집이나 될까 말까한 그의 이웃에서도 소문이 퍼져 놀림을 받았다.



    15살때 상경, 주경야독으로 대졸까지



    가난이 싫어 15살 때 상경했다. 주머니엔 교통비 2만원이 전부. 기술을 배워 돈을 벌고 말겠다는 꿈이 한처럼 맺혀 있었다.

    모래내 한 지하 가방공장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야간작업을 하며 한달 월급 1만3,000원을 받고 살았다. 인천 주안공단, 구로공단도 돌았다. 차곡차곡 모은 돈으론 학원을 다니며 독학해 남은 공부를 계속했다.

    묵묵히 일만 할 뿐 지나치도록 내성적인 성격 탓에 직장안의 인간관계도 여의치 않았다.

    이따금 형이 찾아와 빼앗다시피 자신이 모은 돈을 가져갈 때도 한마디 반항도 하지 못했다. '나같은 약자가 살아서 뭐하나'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신이 있기나 한건지, 아무리 고생해봐야 낙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중단할뻔 했던 공부를 계속한 건 누나가 마음을 잡아준 덕분이었다. 같은 공단 사원 약 500명중에 자신처럼 주경야독을 하는 사람은 불과 두세명. 남보다 서둘러 야간작업을 마치고 학원으로 향할 때마다 '공돌이가 웬 공부냐'며 따돌림도 많이 당했다.

    공장 일을 그만둔 뒤 태평로에서 악세사리 노점상을 열었다. 몇백원짜리 머리핀 등을 파는 일.

    가끔 단속반이 나와 뒤엎긴 했지만 또래의 친구보다 많은 돈을 번다는 생각에 조금씩 힘도 났다. 꼬박꼬박 저축하면서 통장이 너댓개로 불어났다.

    자취방도 얻고 한 아파트촌 어귀에서 겨울이면 호떡장사, 여름이면 아이스크림 장사를 벌였다. 자리 텃세로 쫓겨나기도 여러번, 상가 점포 주인들 신고로 며칠간 구류와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남들처럼 든든한 부모님이나 따뜻한 형이라도 있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을 텐데, 그런 날은 혼자 방안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곤 팔다 남은 호떡을 먹는데, 정신적으로 불안하면 거식증이 생긴다더니, 정말 더 들어갈 틈없이 배가 부른데도 기계처럼 헉헉거리면서 자꾸 호떡을 입에 넣다가 쓰러져 자고는 다음날 퉁퉁 부은 얼굴로 다시 장사하러 나가는 일이 많았죠."

    사람의 능력은 함부로 예단할 게 못된다. 대인공포증에 가까울 만큼 그토록 숫기 없던 그가 장사를 하면서 어느덧 손님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너스레도 떨고 있는 것이다.

    위축된 환경에서만 입이 닫힐 뿐, 마음이 자유로운 곳에선 자신도 못지않은 표현욕구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발견했다. 다만 그 편차가 심한 게 문제였다.

    상도동 한 술집에서 얼떨결에 웨이터 생활도 몇 달, 그렇게 10년동안 모은 약 3,000만원을 한번에 떼였다. 사회생활에서 알게 된 한 사람을 믿고 그의 양식업에 동업자로 투자했다가 그 사람이 사라진 것. 전 재산이 날아갔다. 잡히기만 하면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허사였다. 인생을 배우는 월사금이었다고, 이젠 오래전 과거사로 용서한 일이다.

    25세 무렵, 빈손으로 다시 시작했다. 명동의 한 고층빌딩 구두닦이로. 수입은 웬만한 대졸 사원 봉급보다 높았다. 구부려 앉은 자세에 무리한 오른팔 작업으로 어깨와 허리통증, 인대가 늘어나는 지경에 이르고서야 그만뒀다. 공부도 거의 마쳐갈 때였다. 그의 최종학력은 대졸.



    콤플렉스 딛고 나중엔 화술강사로



    그 힘겨운 생활 사이사이에 말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치려 부단히 애썼다. 처음엔 '배짱으로 삽시다', '적극적 사고방식'등 관련 책마다 눈에 띄는 대로 사 읽었다. 구세주였다. 고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건졌다. 화술학원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옛날만해도 화술강의에 대한 인식이 희박할 때라 전문학원도 많지 않았고, 자신처럼 성격적인 문제로 절박한 사람들이나 몇몇 다니는 곳이었다. 수강료가 적지 않았지만, 남들처럼 당당함만 회복할 수 있다면 천금을 주고라도 피할 처지가 아니었다.

    열성 끝에 남보다 진전도 빨랐다. 잘 한다는 인정을 받으면서 나중엔 본의 아니게 선생의 유고 시마다 대신 강단에 서는 보조강사 역할까지 맡았다. 실제로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교육내용을 따라왔었으므로 각 훈련의 어려움과 포인트를 잘 알고 있었다.

    발성연습을 위해 새벽마다 한강 둔치공원에 나가 1시간씩 강물을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기도 했고, 남산에 올라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비오듯 진땀을 흘리면서도 숫자 천까지 세고 내려왔던 그다.

    지하철에 뛰어들어 난데없이 5분 스피치를 쏟아놓고 나오는 연습도 이미 수없이 했던 터. "일부러 더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이겨내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얼마나 괴로운 건지, 해 본 사람 아니면 잘 모를 겁니다.

    한번은 객차내 스피치를 하려고 지하철에 올라탔는데 서울에서 인천까지 수십 정차역을 지나는 동안 '다음 역에선 꼭 해야지'하며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한번도 못하고 내린 일이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 바보야, 죽어라' 제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자 나중엔 오히려 길거리를 걸을 때도 가만히 있으면 자꾸 입이 근질거려 공연히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쳐보든지, 그렇게 달라지더군요. "

    26세 때부터 정식 보조강사로 일했다. 주로 일본에서 들여온 이론 위주로 가르치던 기존 화술강사들과는 달리 수강생들은 그의 이야기가 아주 현실적으로 쏙쏙 들어온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신이 지독하게 겪었던 과정이었기 때문.



    스피치 전문연구소 설립이 꿈



    3년 뒤 한국인성개발원 교육실장으로 약 7년간 활동했다. 그리고 3년전 종로에 있는 현재의 스피치센터를 열고 비로소 제 자리를 잡았다.

    현재 연세대 사회교육원 주임강사와 현대문화센터 강사로도 활동중이다. 가르치는 보람 못지않게 상담자들로부터 배우는 것도 많다. 첫 만남부터 횡설수설의 정도가 심각했던 한 40대 남성은 미적미적 두달을 훈련받더니 결국 두달만에 포기하고 나갔다가 3년만에 다시 그를 찾았다.

    그간 고충이 심했던 모양이다. 태도도 달라졌다. 아주 열심이었다. 사실상 교정의 성패여부는 본인의 마음가짐이 90%. 6개월만에 사람이 달라졌다. 횡설수설이 사라지고 아주 조리있는 말솜씨가 나타난 것이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자신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약이 세월이구나, 시간이구나,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 어떤 훌륭한 의사보다도 좋은 의사지요."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화술교육을 위한 전문연수도 받았던 그는 앞으로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로 화술교육의 효과를 입증하는 것이 스스로 낸 숙제다. 돈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많지만, 용도가 정해져 있다.

    죽을 때쯤엔 스피치전문연구소나 아카데미를 세워 과거의 자신처럼 대화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훈련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올 봄엔 대학원에도 진학한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새삼 또 공부냐고 할지 모르지만, 늦어도 할 일은 하고 본다.

    "영욱아, 넌 해내야 돼, 넌 할 수 있어. 으하하하" 오래 전에 마스터한 화술교본의 한 구절은 그에게 평생토록 효험 있는 자기 응원구호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s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1/01/30 20:03

  • HOM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