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어제와 오늘] 독자가 사랑하는 언론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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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1.08.02 15:04:59 | 수정시간 : 2001.08.02 15:04:59
  • [어제와 오늘] 독자가 사랑하는 언론사주

    두 여성의 죽음은 죽음 자체로는 서울과 워싱턴이 다룰 수가 없다. 그러나 두 죽음을 보는 인식의 차이는 태평양 만큼 넓다.

    84세로, 워싱턴 포스트지 3대 사주로 7월17일 서거한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 태평양 넘어 서울에서 투신 절명한 동아일보 3대사주 김병관 명예회장의 부인 안경희 여사. 두 여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가 현격하다.

    그레이엄 여사의 장녀로 칼럼니스트인 래리 웨이모우스는 24일의 장례식에서 추모했다. 어머니 그레이엄 여사는 “아내와 어머니로서는 물론 ‘여성’과 ‘여사’로서도 성공적 삶을 살았다”고 했다.

    또 그레이엄 여사는 남은 4명의 자녀에게 생전 유언을 했다. 위독 해질 때 산소 호흡기 등을 사용 못하도록 한 것이다. 웨이모우스는 추모사에서 그레이엄 여사가 “죽음이란 태어나는 것, 자라나는 것, 성공하는 것, 나이 먹는 것과 똑 같은 현실이다. 그건 인간에게 확실한 현실이다. 그러기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유언했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그레이엄 여사의 유족들과 장례식에 모인 조객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안경희 여사의 죽음을 확실한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27일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은 회장직을 떠나며 아내의 죽음에 대해 말했다.

    “내자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것도 결국은 저의 부덕의 소치입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아내의 죽음이 궁극적으로 동아일보를 지키고, 거듭 태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마음의 아픔을 견딜 길이 없습니다.”

    동아일보 사주유족이나 동아일보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안 여사의 죽음은 슬픔을 던져 주는 것이며 한의 씨앗이 될지도 모른다.

    왜 이런 죽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생겨 났을까. 동아일보는 1920년에, 워싱턴 포스트지는 1933년에 창간되어 역사에는 큰 차이가 없다. 두 신문이 한국과 미국에서 누리는 지위도 일류에 속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동아일보의 김병관 회장이 남성이고, 그레이엄 회장이 여성인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워싱턴 포스트 지는 자신의 신문이 워싱턴의 3류 신문에서 1류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첫 번째 공로자로 그레이엄 여사를, 두 번째 공로자로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편집국장이던 벤자민 브래들리를 꼽고 있다. 브래들리가 30년 지기인 그레이엄을 저승으로 보내며 한 조사는 좀 길다.

    “그레이엄은 위대한 사주다. 열정을 갖되 편애 없이, 공정성과 용기를 갖고 진실이란 단순한 것을 찾는데 그녀 자신을 몰입시켰다. 또한 그는 정열과 높은 도덕과 원칙을 항상 간직했다. 위대한 사주는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기자와 편집자들이 밝혀주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브래들리는 사주였던, 여성이었던 그레이엄 여사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을 맺었다.

    이런 편집국장과 그런 언론사주의 진짜사랑(?)을 알아서 였을까. 워싱턴 포스트지에 따르면 그레이엄의 장례식장에는 수백명의 독자들이 자전거로, 리무진으로, 버스로 새벽부터 몰려들었다.

    장례식장 밖 맨 앞줄에 오전 7시20분에 도착해 줄을 서있던 61세의 위니 스탠톤이란 여성은 20여년전을 회고했다. 과학수사연구소 직원이었던 스탠톤은 그레이엄 여사의 한 친척의 사인을 조사 했었다. 그레이엄은 연구소에 둘러 친절하게 친척을 대해준 것에 감사하고 떠났다.

    그녀는 당시 감사를 표시했던 사람이 바로 그레이엄 여사라는 사실을 소장실에 불려가서야 알았다. “그렇게 바쁜 분이 나를 찾아오고 또 소장에게 나를 칭찬했다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 일을 잊을 수 없다.”

    40년전 정부공무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워싱턴 포스트지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70세의 베아트리스 맹게는 “나는 온몸으로 오늘 장례식에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신문은 가족이기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워터게이트 보도 때 하버드대 법대생이었고 지금은 배송업자인 어네스트 패터슨은 검은 넥타이에 모자까지 쓴 채 오전 8시45분께 줄을 섰다.

    “그 같은 용기(워싱턴 포스트지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할 당시 그레이엄 여사와 회사에 닉슨 정권이 강한 외압을 가했으나 그레이엄 여사는 경영권을 이용해 편집권을 누르지 않았고, 그 결과 워싱턴 포스트지 기자들이 사실보도를 할 수 있었으며 닉슨 대통령은 사건이 확대되면서 사임했음)를 보여 준다면, 누군들 지지 않겠는가. 그는 위험한 도박에 나서 이겼고 그게 우리(미국시민)를 향상 시켰다“며 장례식 참석의 이유를 댔다.

    그레이엄 여사는 분명 독자로부터 사랑받는 언론사주였다. 그러기에 그는 보도 해야 할 것을 보도해 신문기업으로도 성공했다.

    그레이엄 여사는 위대한 여성이었고 또한 좋은 사람이었다. 그가 뉴욕 타임스에 이어 정부의 보도중지 명령에도 불구, 이른바 ‘펜타곤페이퍼(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지시로 만들어진 월남전 관련 극비문서.

    미국이 무차별적으로 베트남 양민을 학살했고 미국정부가 미국인들에게 베트남 참전의 정당성을 주입시키기 위한 조직적인 선전활동을 했다는 민감한 내용이 들어있음)’를 보도 한 것은 워싱턴 포스트지의 성장이나 이익만을 위한 모험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펜타곤페이퍼를 보도 않으면 워싱턴 포스트라는 신문사는 존재 할 수 없다는 원리를 실천 한 것 뿐이다. 보도해야 할 것을 보도하는 것이 어렵기에 독자들은 그레이엄 여사를 사랑한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1/08/0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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