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땅이름] 서울 용산구 한강로의 동호(東湖)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플러스 네이버 북마크 싸이월드 공감 기사 구입 프린트 기사메일
입력시간 : 2001.08.08 20:10:49 | 수정시간 : 2001.08.08 20:10:49
  • [땅이름] 서울 용산구 한강로의 동호(東湖)



    한강이 금강산(북한강)과 태백산(남한강)에서 발원해 흘러오면서 서울 응봉(鷹峰)과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이르러, 물이 서서히 흐르면서 큰 호수를 이루니 ‘동호(東湖)’라 부른다.

    동호란 경복궁(景福宮)에서 보아 동쪽 호수라는 뜻. 동호는 유속이 느리고 겨울에 얼음이 얼면, 빙질이 좋아 그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사시사철 왕실에 진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얼음을 저장하던 곳의 땅 이름이 오늘날 동비고동(東氷庫洞)과 서빙고동(西氷庫洞)으로 남아 있다.

    또 옥수동 중턱에는 얼음을 채취하기 전에 용신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빙고단(氷庫壇) 자리가 지금도 남아있다.

    동호는 예로부터 산수가 어우러져 풍광이 꽤나 좋았던 모양이다. 오늘날 한남대교 북단 언덕(한남동 537번지)에는 왕가의 별장으로 사신을 영접하던 제천정(濟川亭)이 얹혀 있었고, 또 외국인촌으로 불리는 한남동의 마루턱에 오르면 거울처럼 맑은 호수를 바라다 볼 수 있다 하여 화경대(華鏡臺)라 일컬었다.

    화경대 위에는 동호에 평화롭게 노니는 갈매기의 모습이 꿈속의 비경과 같다고 하여 몽구정(夢鷗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데 모두가 사라진지 오래됐다.

    또 화경대 가장자리(한남동 459번지)에는 황희 정승의 손서 김국광(金國光)이 지었다는 천일정(天一亭)도 있었다는데…

    그래서 동호의 호심위에는 늘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그칠 날이 없어, 풍류와 시가 흘렀다고 한다. 영남 강호시가 문학의 대가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이 관직을 그만두고 그의 고향인 예안(禮安)으로 낙향하면서 그 당시 문인들인 조계상(曹繼商), 김안국(金安國), 성세창(成世昌), 송인수(宋麟壽), 장적(張籍), 이퇴계(李退溪) 등과 동호에서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면이 나온다.

    1542년 7월17일 퇴계와 농암이 이 동호의 제천정에서 또는 배 위에서 사흘간에 걸쳐 농암을 전별하는 시를 나눈다.

    퇴계는 ‘송이참판남행(送李參判南行)’이란 제목의시 한수를 짓는가 하면, 제천정에서 ‘송이참판사환(送李參判辭還)’이란 7언절구도 짓는다.

    또 정세호(鄭世虎), 김광준(金光準), 주세붕(周世鵬)등과 함께 동호의 닥섬(楮子島)까지 농암 이현보를 전송하며 시문을 나눈다.

    ‘소광(疎光)의 은퇴처럼 공은 이미 이루어졌고/ 전별인사 구름 같아 후생을 감동시키네/ 맑은 날 신선처럼 오르니 어찌 글로 나타내리/ 급류 시절, 어떻게 이런 명예로운 은퇴가 있을까.’ 퇴계의 시다.

    ‘나부끼며 돌아가는 어부같이/ 바로 긴 한강을 거슬러 왔네/ 오늘 죽령으로 돌아온 뜻은/ 천지만고의 강상이 아니랴!’ 당대 문인의 거두라 할 주세붕의 시다.

    이어, 농암 이현보는 또 시로써 답한다.

    ‘이별 섭섭해 총총히 따라오는 벗들/ 숲 속 마을에서 배를 나누어 탔다/ 피리소리 끊어지고 사람들 멀어지는데/ 날 저문 강가는 아득하기만 하구나// 돌아보니 북악은 높이 솟아/ 산 같은 무거운 은혜 새롭구나/ 어찌 나라 은혜를 다 갚았다 하리오/가을 바람에 낙엽은 뿌리로 돌아가는 법이라네.’

    동호는 강심에 시심이 뜨고 가락이 흐르던 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화에 밀려 닥섬도 체천정도 사라진지 오래고 시정이 흐르던 동호의 풍광은 찾을 길이 없다. 당대 의문인들이 동호에서 시심을 나눈 것이 뒷날 영남의 강호문학을 낳았을까. 세월이여!

    입력시간 2001/08/08 20:10

  • HOM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