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인간탐구] 재난구조전문가 정동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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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1.08.08 20:55:37 | 수정시간 : 2001.08.08 20:55:37
  • [인간탐구] 재난구조전문가 정동남

    "뒤집어진 것들 바로 세워야죠"



    여름철이라 한창 힘드시지 않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폐부를 찔렀다. "요즘 우리나라에 어디 사고철이 따로 있습니까? 일년 내내 뒤집어지지 않습니까? “

    그는 바쁘다. 당장만해도 파주와 문산, 연천 등 얼마전 또다시 수해가 강타한 지역에 뛰어들고 있다. 며칠사이 시체 다섯구를 건졌다. 엄청난 비에 자동차가 전복되고 떠내려가면서 실종된 사람들이었다. 아직도 수색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구조연합회 회장 정동남(51). 비영리 민간단체인 이 기구는 그 아래전국 각 지역에 지역대가 있어서 비상시마다 긴급파견돼 전력구조활동을 벌인다.

    정씨가 직접 잠수복과 산소통에 의지해 진흙탕 강물에 뛰어드는 일은 후배들 덕분에 예전보다 줄었지만, 모든 상황판단과 수색작전을 지휘하는 일은 여전히 그의 몫이다. 몸사리지 않고 뛰는 이 민간구조대 대장을 유가족들도, 후배들도 기대속에 쳐다보고 있다.

    워낙 오랜기간 구조활동에 앞장서 나서다보니 가끔은 그가 탤런트라는 사실조차 잠깐씩 까먹을 만 하다. 30년전 개인적인 봉사활동으로 시작한 그는 15년전부터 본격 민간구조대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움직여왔다. 그 바람에 방송출연 횟수가 줄다보니 당연한 결과다.


    “누가 뭐래도 난 영원한 탤런트”



    "누가 뭐래도 저는 평생 탤런트입니다. 제 꿈이 그것이었고, 앞으로도 절대 그 일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워낙 이 방면에서 알려지다보니 이젠 방송사에서도 출연섭외가 뜸하게 들어옵니다. 어쩌다 들어오는 것도 구조를 하는 일, 위험한 상황에 뛰어드는 일,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하려 들지도 않을 험한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불가피한 자업자득이다. 수입이 될 만한 연속극 출연은 섭외가 들어와도 맡을 여력이 없다. 수시로 터지는 사고현장 때문이다. 그래서 간간이 단막극 정도로만 낯을 디민다. 탤런트라는 이름을 잃지 않은 것만해도 다행이다.

    탤런트 생활 30년, 구조활동경력도 30년 동갑이다. 처음 이 일에 뛰어든것은 1969년 하나뿐인 남동생을 사고로 잃으면서부터다. 동생이 한강에서 수영을 하다 익사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당장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업자'는 시신을 건져주지 않았다.

    애끓는 가족은 아랑곳없이 며칠이나 버티던 인양자는 간신히 돈을 마련해 건네주자 그제서야 배를 움직였다. 막상 작업이 시작되자 단 10분만에 인양이 끝났다. 유족들의 슬픔을 담보로 한, 파렴치한 장사였다. 그 이후 그는 스스로 구조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해군 UDT 특수교육을 받고 잠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71년 TBC 방송국 탤런트이자 무술사범으로 입사했다. 연기활동을 펴는 한편, 틈날때마다 구조현장을 찾던 그는 1975년부터 순수 민간봉사단체를 발족해 본격적인 인명구조사업에 나섰다.

    ”초창기엔 시체를 건지다가 제가 놀라 심장마비로 죽을 뻔한 일도 있습니다. 1976년인가 대천해수욕장에서 한 여대생이 빠져 죽었는데 하루 종일수색을 해도 없었습니다.

    그땐 별 특수장비도 없어서 그냥 오리발에다 물안경만 쓰고 들어가 숨이 차면 한번씩 물에서 나와 호흡하고는 다시 잠수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봐도 시체는 없고, 일단 숨을 쉬어야겠다고 물쪽으로 나와 고개를 쳐드는 순간 내 머리 위에 그 여자시체가 떠있는 겁니다. 완전히 혼비백산해서 본능적으로 해안가로 도망을 간다는 것이, 그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니 자꾸 해안 반대쪽으로 미친 듯이 달아나더라는 겁니다.

    그 일 이후 며칠 내내 밥도 못 먹었습니다. 꿈에도 그 시체가 나타나 가위에 눌리고, 그 해 여름 내내 멍하니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해엔 구조활동이고 뭐고, 완전히 망쳤지요."



    육ㆍ해ㆍ공으로 전방위 참변이 빚어졌던 재앙의 해 1993년엔 특히 그가 연예활동 20여년만에 감격적인 전성기를 맞고 있던 때였다. 맥주 깡통을 물어뜯고, 콧바람을 일으키는 등 비장의 '깜짝쇼’를선보이고 드라마 '서울 뚝배기’의 '점박이’역으로 인기를 끌면서 이제 겨우 빛을 보나 싶던 절정기였다. 그 여세를 몰았어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해부터 한국의 대 수난기가 시작됐다. 아시아나 여객기 사고, 서해 페리호 침몰 사고, 구포 열차 전복사고가 터졌다. 무조건 달려갔다.

    그의 구조활동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서해 페리호사고 현장을 맹렬하게 누비던 중이었다. 출신이 출신인지라 남들보다 더 시선이 몰렸다. '시체박사’, '점박이 형님’은 그러나 유족들과 구조대 사이에서 더 유명하고 친근한 사람이었다.


    사고현장서 더 자주 만나는 ‘점박이 형님’



    그후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대구 가스폭발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6년 대형 수해, 1997년 KAL기 괌 추락사고, 1998년 뱀사골 수해 조난사고 등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3년전부터는 특히 수해가 매년 단골로 들이닥치고 있다. 본업은 뒷전, 우선 사람을 구하러 갔다가 그 자신이 사고를 당할뻔도 했다.

    며칠동안 물에서 부패된 시신과 접촉하다보면 갖가지 오염물까지 뒤섞여 수시로 피부병을 옮아오기가 보통. 사방에서 진동하는 퀴퀴한 피냄새와 썩는 냄새, 끔찍한 광경들은 너무 흔히봐서 무덤덤해졌다.

    수십년 현장을 누비다보니 이젠 어디가서도 작전대장 노릇을 다 한다. 성수대교사고때엔 투입된 군과 경찰, 해경이 연거푸 한 곳에만 집중하는 것을 보고 직접 수색지역을 나눠 분담시키기도 했다.

    실제로 소방대원 등 관의 구조인력상당수가 그로부터 구조교육을 받은 후배들. 적어도 얼마전까지는 관과의 협조도 긴밀했다.

    KAL기 괌사고때는 유가족외 유일하게 현지 방문단에 끼어있었다. 유족들의 희망에 따라 이뤄진 '특권’이었다. 사고 현장은 미해군작전지역에 있어서 유족은 물론 미국 현지 언론도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히 통제됐다.

    그곳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출입이 허용된 사람이 정씨였다. 국내 각종 전문구조교육은 물론 한국에서 유일하게 UN이 지정한 네덜란드 ICET(국제구급구조교육전문기관) 지도자 교육을 받은 경력을 들이밀고도 통하지 않아, 유족들이 단체로 거센 항의시위까지 벌이고서야 겨우 이뤄진 일이었다.

    "막상 들어가보니 그 사람들(미국측 조사단)이 하는 식으로해선 석달이 걸려도 다 못하겠더라구요. 손만 해도 겹겹이 고무장갑 같은 것에다 또 특수재질의 장갑을 끼는 등 온 몸이 완전히 우주복같은 차림으로 조사를 하는거예요.

    시체도 마치 유적발굴 하듯이 하나하나 흙을 쓸어내며 꺼내는데, 답답해서 더 못보겠더라구요. 이미 깃발로 표시해 둔 시체만 289구인데 그렇게해서 언제 다 남은 시신을 찾고 수습하겠습니까.

    보다 못해서 총책임자에게 '나는 이런 옷 벗고 우리식대로 하겠다'고 말하자 '그럼 병균에 감염된다'고 말리더군요.

    '나는 같은 한국인이라서 괜찮다'고 하고는 반바지에다 셔츠, 면장갑만 하나 달랑끼고는 내식대로 작업을 해치웠습니다. 시체에 슨 구더기같은 것도 내 손으로 팍 집어내 그것을 일부러 미국인들 쪽으로 내던지기도 했습니다. 얄미워서요. 그렇게 했더니 3개월 예정으로 돼 있던 작업이 단 20일만에 다 끝나버리더군요."

    귀국후 그 자신의 신상엔 온갖 불상사들이 다 터져있었다. 예정돼 있던 출연스케줄은 줄줄이 펑크가 나 버렸고, 심지어 한 방송제작 업체에선 손해배상소송까지 들먹였다. 그 뒷처리 때문에 적지않은 고통을 받았다.

    얼마 뒤 그는 한국인 유족과 미국 현장팀들의 작은 영웅이 되었다. 조사전엔 그렇게도 비협조적이던 미연방정부의 NTSB(사고조사위원회)로부터 오히려 감사표창을 받았고, 명예요원으로도 위촉됐다.



    현장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은 결과다. 그후 유족들의 적극적인 추천과 함께 다음해 1월 구조전문가로선 유일하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과 좋은 한국인 대상등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떠서' 이젠 탈.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언제부터인가 관에서 의견제를 느끼기 시작했다. 소위 '공적 세우기 경쟁' 때문에 민간단체의 개입을 반가와하지 않는 것이다. 노는 장비라도 빌릴라치면 '차라리 손을 떼고 빠지라'고 권하기 일쑤. 외로운 별동대가 돼 버렸다.

    "사고가 터지면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하는 것도 우리 지역대입니다. 자기 생업도 팽개치고 사고가 완전히 수습될 때까지는 몇날 며칠이고 끝까지 현장을 지키며 주민들을 돕습니다.

    전부 자기 시간과 돈까지 써가며 일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국민의 혈세로 지원받으며 그 일을 제대로 책임져줘야 할 관에선 얼마간 조사와 복구작업을 하다가 곧 철수해 버립니다. 길어야 2-3일 입니다.

    결국 유족들이 찾아와 하소연하고 의지하는 건 우리입니다. 우리도 우리지만 왜 허구한 날 사고만 터지면 군인들만 고생입니까. 지금도 파주나 연천 등 수해지역에 가보면 군인들이나 우리밖에 없습니다. 구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만 제대로 돼 있다면 절대 이런 일은 없을겁니다."

    공무원들의 재난대책에 대해서는 특히 할 말이 많다. 그 단적인 예가 지난해 경찰청에서 별도조직으로 구성한 '재난관리 긴급출동부대'. 참으로 화려한 출발이었다.

    그런데 그간 몇번이나 수해가 터지도록 전혀 '출동'된 바 없는 출동부대다. 그토록 자랑스레 홍보하던 고가의 구조장비 마저 바로 얼마전까지 아예 포장도 뜯지 않은 채 1년이 넘도록 창고안에 방치돼 있었다.

    더한 심한 것은 구조단에게 구조교육조차 실시한 바가 없다는 것. 얼마전 정씨가 그 문제를 지적하고 난 뒤 최근 교육이 시작됐다는 후문이다. 늦으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국제무대로 발 넓힌 구조활동, 이상한 소문엔 ‘답답’



    1999년 대만 지진현장과 지난 3월 인도 지진현장까지 원정을 다녀왔던 정씨. 국제무대에까지 불려갔다 돌아오자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소문도 돌기 시작했다.

    그간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는 것이 아닌가 묻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늘에 맹세코 그런 일은 없다'고 응수하지만 그런 질문과 시각 자체가 그에겐 답답하다.

    그가 뛸 무대는 여전히 재난현장 뿐이다. 지난 연천군 장남면 수해때엔 주민 850명이 고립된 현장에 한밤중 손전등만 든 채 배를 타고 들어가 어린이와 뇌수술자를 구했다.

    죽음를 각오한 사투, 다시한번 보급물자를 들고 같은길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마터면 자신들도 변을 당할 뻔 했다. 연천군 진상면 황지리에선 폭우로 인한 심한 급류를 뚫고 목숨 건 래프팅까지 벌여가며 주민들을 구하기도 했다.

    며칠전엔 자신의 막내 아들이 교통사고로 한쪽 팔이 마비되는 내환까지 겹쳤다. 완치 여부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 개인적인 우환속에서 그는 더욱 더 구조작업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아들놈 같은 경우에도 구조시 전문 의료진만 갖춰져 있었다면 신경마비 상태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 같아 아쉬움이 큽니다.

    뭣보다 시급한 것은 관이 적극적으로 전문가를 영입하고 민간구조단와 공조체계를 구축해 보다 많은 생명을 효율적으로 구제하는 일입니다. 아직도 아까운 생명이 너무 쉽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입력시간 2001/08/0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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