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추억의 LP여행] 이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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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03.05 15:03:07 | 수정시간 : 2003.03.05 15:03:07
  • [추억의 LP여행] 이수미

    다시 부르는 '여고시절', 시련은 없다

    높은 인기만큼이나 온갖 사건·사고들로 고통 받는 삶을 살아온 비련의 여 가수 이수미. 1970년대 초 정훈희, 김태희와 더불어 트로이카시대를 구축했던 그녀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상의 인기 가수였다.

    귀여운 외모에 감칠맛 나는 목소리는 젊은 남성들의 흠모를 듬뿍 받았다. 1972년 발표한 대표 곡 '여고시절'은 신인 가수상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MBC 10대 가수상, TBC 7대가수상을 수상받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녀는 수많은 사건에 휘말려 좌절하면서도 매번 오뚝이처럼 재기를 거듭한 특이한 이력의 여가수이다.

    이수미는 건설업자인 부친 이영서씨와 모친 임순례씨의 8남매 중 다섯째로 전남 영암군 학산군의 시골마을에서 1952년 1월 25일 태어났다. 목포에 나가 SP음반을 구입해 집안에서 축음기로 항상 국악을 즐겨 듣던 부친의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학산 초등학교 4학년대 아버지가 노래를 잘 한다며 딸에게 라디오와 야외전축을 사주자 늘 뒤뜰 감나무 위에 올라가 노래를 따라 불렀다. 동네 어른들은 어린 그녀의 노래를 좋아해 동네최고 인기가수로 사랑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노래 잘하는 딸을 아버님은 예뻐 했지만 직업 가수로 나서는 것은 한사코 반대했다"고 말한다.

    그녀의 운명을 바꾼 것은 목포여고 3학년때. 낭주 중학교를 거쳐 목포여고를 다닐 때만 해도 그녀는 수줍음 시골 학생이었으나 노래의 대한 끼와 갈증은 감술수가 없어 3학년이 되던 1969년 목포 KBS 노래자랑대회에 나갔다. 학생 신분이라 언니들 옷을 빌려 입고 가발을 뒤집어써야 했다.

    결과는 5주 연속 우승. 이듬해 목포 MBC가 생기면서 MBC 년 말 노래자랑 결산 방송에서 참관 온 오아시스 손진석 사장에게 픽업되어 상경했다. 이때가 1970년.

    데뷔시절 이수미는 김하정의 '사랑', 김상국의 '불나비' 등 팝 재즈계열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1971년 작곡가 남국인의 곡 '때늦은 후회지만'과 '배 떠나가네'는 그녀의 데뷔 곡이었다. 그녀는 트로트가수로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트로트 가수로는 별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72년 김영광의 팝 계열 곡 '여고시절'은 폭발적인 반응을 몰고 왔다. 그녀는 단숨에 정훈희, 김태희와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며 최고의 여가수로 급부상했다.

    여고시절과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 하나. 작곡가 김영광은 오아시스레코드의 전속가수 모두에게 '여고시절'을 불러보게 했다. 막내였던 이수미는 마지막 차례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를 들은 김영광은 "이 곡은 네가 주인"이라며 곧바로 기타 3대로 동시녹음에 들어갔다. 탄력 있고 구성진 목소리에다 귀여운 용모를 갖춘 그녀는 특히 젊은 남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1972년 말 그녀는 신인가수상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MBC10대 가수와 TBC 7대 가수상을 수상하는 진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달콤했던 인기는 혹독한 대가를 요구했다.

    1973년 여름, 언론지면을 뜨겁게 달구었던 '대천 해수욕장 면도칼 자해사건'이 터졌다. 일약 스타덤에 올라있던 '이수미가 면도칼에 난자 당해 병원에 실려갔다'는 기사는 큰 파문을 일으키며 법정문제로 확대되었다.

    "스스로 자해를 한 것"으로 종결된 이 사건은 "자해가 아닌 모 방송국의 유명DJ가 저지른 짓"이라는 꼬리에 꼬리를 문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거졌다. 이수미는 씻을 수 없는 심신의 고통에 좌절했다.

    1년 후인 1974년 말, 그녀는 '조용히 살고 싶어'라는 곡으로 재기를 노렸지만 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1975년 김영광 작곡 박건호 작사의 '내 곁에 있어주'는 명예회복은 물론 TBC 최고 여자가수상과 더불어 MBC10대가수상에다 MBC최고 인기 곡으로 선정된 공전의 히트 곡이었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를 성적으로 저급하게 고친 노래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억울하게 연루된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금지의 멍에가 씌워졌다. 1980년, 활동 규제가 풀릴 때까지 이수미는 외부와 스스로를 단절하고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노래에 대한 갈증은 재기를 시도하게 했다.

    하지만 좌절로 인한 충격으로 고음이 약해지고 탄력이 사라진 건조한 목소리에 울고만 싶었다. 자포자기 상태로 김영광의 곡 '죄가 되나요'란 곡으로 무모한 재도전을 했지만 이번에는 군사정권에 의해 '연예인 정화 대상'에 올랐다. 터무니없는 족쇄가 다시 채워지자 그녀는 실어증에 걸릴 만큼 정신까지 황폐화되며 좌절했다.

    1985년 김영광과 함께 '좋은 일이 없을까요' 등으로 또다시 재기를 시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이 후 그녀는 대중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며 사망 설까지 나돌았다.

    1997년 11월 외롭게 홀로 살아오던 그녀는 의료기 사업가 배제동씨와 결혼을 하며 안정을 찾았다. 또한 SBS 시트콤 '여고시절'에서 자신의 노래가 타이틀 곡으로 나오고 신세대들도 따라 부르는 것을 보자 다시 용기가 났다.

    2001년에 남편의 도움으로 '여고시절'이 수록된 72년 히트음반을 재 발표했다. 힘을 얻은 이수미는 미사리 카페 촌에서 공연을 하며 목소리를 회복해 2001년 10월, 20년 만에 데뷔 30년 기념앨범을 발표했다.

    이후 2002년 11월 선배 최희준의 재기콘서트 무대에 출연한 그녀는 정훈희와 함께 부산, 서울에서 우정의 콘서트로 무대활동을 재개했다. 다소 허스키한 저음의 창법으로 변모한 이수미는 "인기보다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며 이제는 복음성가 가수를 꿈꾸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3/03/0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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