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추억의 LP여행] 김도균(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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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03.25 13:10:55 | 수정시간 : 2003.03.25 13:10:55
  • [추억의 LP여행] 김도균(下)

    한국적 록 사운드 세계를 꿈꾸다



    백두산 2집에서 들려준 김도균의 기타 연주는 그를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떠오르게했다. 당시 여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던 그는 "연습실에는 여학생들이 매일같이 진을 쳤고 팬 클럽도 생겼다"고 웃는다. 백두산은 헤비 메탈 그롭으로 처음으로 1987년 KBS 10대 가수상 그룹 부문 후보에오르는 이변을 연출하며 관심을 끌었다.

    2집이 일본에서 발매되자 일본의 헤비 메탈 전문잡지 'BURN'은 "한국에 초강력 헤비 메탈 밴드가 출연했다"고 흥분한 리뷰를 실었다.

    2집의 성공에 고무된 맴버들과는 달리 김도균은헤비 메탈 사운드가 사물놀이로 연상될 만큼 록에 빠져들고 있었다. 록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었던 그는 멤버들과 음악적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백두산은 해체의 순서를 밟았다.

    김도균은 록인코리아 기획 음반과 첫 솔로 연주음반 'CENTER OF THE UNIVERSE-1988년'을 발표하며 한국적 록 사운드에 몰입했다. '아리랑'을 가야금 주법으로 표현하는 등 음악적 끼가 넘쳤던 그의 솔로 음반은 록 마니아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폭넓은 대중이 수용하기에는 시기장조였다. 국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지라 실험적인 시도 이상의 음악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

    그는 88년 12월 원대한 꿈을 품고 헤비 메탈의 본고장 영국 런던으로 건너 갔다. 현지에서 드러머 미크를 만난 후 임재범을 불러 한국말 '사랑'을 영문으로 표기한 4인조 록 르굽 'SARANG'을 결성했다. 웨일즈의 카디브 대학에서 가진 첫 공연. 백두산, 외인부대 때의 레퍼토리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영국에서는 평범한 사운드였기 때문이다.

    '스완지'에서 두번째 공연을 시도했다. 첫 공연과는달리 개량 한복을 입고 '아리랑'등 국악 록을 들려주었다. 관객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순간 그는 한국적 가락을 접목한 록이야말로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월드 뮤직임을 절감했다.

    9개월 후 일본그룹으로는 유일하게 빌보드 챠트에 올랐던 해비 메탈 그룹 'LOUDNESS'의 내한공연이 스페셜 게스트로 참가하기 위해 귀국했다. 이들과 함께 월드 투어를 꿈꿨지만 사업상 문제로 무산되자 스스로 '세계시장 진출'이라는 야망을 품었다.

    보컬 임재범, 카리스마의 베이시스트 김영진, 솔로몬 출신의 드러머 유상원과 함께 결성한 4인조 록 그룹 '아시아나'는 그런 취지로 결성된 한국 헤비 메탈의 드림팀이었다. 아시아나의 유일한 앨범 'OUT ON THE STREET-1990'는 "국내 최초로 영국에서 녹음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녹음을 마치고 귀국한 뒤 일주일만에 팀이 깨져 버렸다. 김도균은 "한국의 현실과 타협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국제적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시아나는 내 음악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좌절의 시간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기분이었다"고 털어놓는다.

    92년 백두산 스타일로 되돌아가 3일조 백두산 2기를 결성했지만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 변진섭 등 랩과 발라드 가수들의 세상이었다. 그을 불운은 계속되었다. 이번엔 대마초 사건이 발목을 잡았다. 이때가 92년 가을. 40일간의 수인생활에서 영국이라는 화려한 세상을 보며 흔들렸던 마음을 접고 종교에 몰두했다.

    하지만 활동금지 후 94년 발표한 '파워 투게더' 앨범과 평범한 2집 역시 록의 관점에서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이었다. 재기에 쫓긴 강박관념이 빚어낸 실패작이었다. 거듭된 좌절 끝에 95년 MBC TV '샘이 깊은 물'에 고정출연을 하게 되었다. 이때 국악과 양악의 접목을 다시 꾀하며 국악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96년 미국여행은 다시 창작의 물꼬를 트게 했다. 기독교방송에서 기획한 '빛으로 모두 함께'라는 옴니버스 복음 음반에 참여하며 CCM 음악활동에 전념했다. 또 한대수의 음반 녹음에 세션으로 참여하며 97년 후쿠오카 공연에도 참가했다.

    2기 백두산의 해체 이후 홀로 음악작업에 전념해 오던 그는 무당의 리더였던 선배 최우섭의 권유로 99년 베이시스트 배찬우, 드러머 박동식과 함께 3인조 국악 록 그룹 '김도균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국악이론 탐구에 몰두하면서 2001년 한대수 공연을 시작으로 국악 록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했다.

    2002년 11월엔 한대수, 이우창과 함께 <삼총사> 프로젝트로 마련된 김도균 그룹의 첫 앨범 <정중동>에서 그는 한결 정제되고 농익은 국악 록 가락을 선보였다. 앨범 발표를 기념하는 세종문화회관의 <삼총사> 공연에서도 그는 관객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는 "정중동 음반은 정규 음반이 아니고 이제까지 답습한 것의 습작일뿐"이라며 "한국적 록 가락에 대한 음악탐험은 이제 시작" 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부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 김태원과 함께 국내에서는 드문 기타 프로젝트 음반 을 발표했다. "예전의 음악으로 회귀하는 것이냐"는우려에 대해 "침체된 한국 록의 부활을 위해 의리를 지켰을 뿐"이라고 단언한다.

    "진짜 소리를 찾은 음반은 죽기 전에 낼 수도 있고 못 낼수도 있다. 다음 세대로 넘어가서라도 진짜 음을 발견할 수 있는 디딤돌이라도 되고 싶다"고 말하는 김도균은 아직 한국 록 음악의 한줄기 빛이다. 그의 홈페이지 www.rock777.net.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hoi@hk.co.kr

    입력시간 2003/03/2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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