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김동식 문화읽기] 성문화의 왜곡과 궤변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플러스 네이버 북마크 싸이월드 공감 기사 구입 프린트 기사메일
입력시간 : 2003.03.31 16:23:45 | 수정시간 : 2003.03.31 16:23:45
  • [김동식 문화읽기] 성문화의 왜곡과 궤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할 줄 알어?’를 들어보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불쾌했다. 음란하다고 알려진 가사가 필자의 도덕 감정을 자극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왜 그런 기분 있지 않은가. 정품 포르노테이프라고 믿고 제 돈 주고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 화질도 엉망이고 설정도 진부한 필름이었음을 확인했을 때의 더러운 기분 말이다.

    펑크(funk) 리듬을 가져다가 이처럼 단조롭고 지루한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가사만 자극적일 뿐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는 한없이 밍숭맹숭한 노래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나 ‘그녀는 예뻤다’에서 보여준 박진영의 감각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으로서는 노래 자체가 너무나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기껏 이 정도의 노래를 놓고 기자회견까지 여는 난리를 쳤단 말인가. 한국 대중문화의 한심한 수준을 한눈에 보여주는 한 편의 코미디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련 기사들을 찾아서 읽어보았는데, 별다른 내용이 없어서 다시 한번 놀랐다. 성에 대한 지나친 엄숙주의와 보수주의는 이중적이고 왜곡된 성문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성은 삶의 일부분이며 즐거워야 한다는 주장이 핵심이었다.

    또한 섹스는 현대 문화상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코드이기 때문에, 선진국 수준으로 규제 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경쟁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그룹 ‘데스티니 차일드’의 리더 비욘세 놀즈를 벤치마킹한 박지윤을 떠올리며, 문화적 경쟁력이라는 표현이 조금 코믹하단 생각도 들었다.)

    성은 삶의 일부분이며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도 없겠지만, 뭔가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환한 미소를 지을 사람도 없지 않을까. 기자들을 불러 놓고 흔히 들을 수 있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은 대중문화권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말로만 듣던 대중문화권력의 실체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가 예상하지 못한 소득이었을 따름이었다.

    성은 즐거운 것이라는 박진영의 생각에는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할 줄 알어?’가 그의 말처럼 즐거운 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과연 기자회견에서 밝힌 그의 신념이 ‘할 줄 알어?’와 최소한의 관련성이라도 갖는 것일까. 잠시 2절 가사를 살펴보자. “내가 맘에 든다고 나를 꼭 갖고 싶다고 baby / 주는 건 문제가 아닌데 감당할 수 있냐고 / 나를 위한 선물 때마다 준비한 이벤트 / 나를 감동시키는 센스 그리고 그걸 계속 할 수 있는 끈기 필수 / 그래 그게 돼야 나를 만족시킬 수 있을거야 / 이런 걸 어떻게 내게 해줄래 응? 응?”

    음란한가 아닌가는 문제가 아니다. 과연 기자들을 불러 공론화할 정도로 ‘즐거운 성’과 관련된 노래인가 하는 점이 논의의 초점일 따름이다. 즐거운 성이 아니라, 성행위와 관련해서 잘 하는가 못 하는가를 문제삼고 있는 노래라는 점이 눈에 띈다.

    성이 무슨 체력장시험인가. 즐거운 성이라기 보다는 입시지옥을 연상시키는 성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잘 해야지 그것도 잘못 하면 속된 말로 뭐도 아니라는 뉘앙스가 즐겁다기보다는 은근히 억압적이다. 주는 건 문제없는데 못하기만 해 봐라는 식의 가사에서 즐겁고 쾌적하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성을 읽어낼 도리는 없었다.

    성적 능력 내지는 성의 도구적 효용성을 주장하고 있는 노래가 과연 성적 해방의 차원과 관련이 있기나 한 것일까. 박진영의 주장처럼 백마 탄 마초(macho)에 대한 송가(頌歌)가 우리사회의 억압적인 성문화에 숨통을 틔어주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억압적인 무의식만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조금 분명해지는 것 같다. ‘할 줄 알어’는 음란하지 않다. 단지 천박하고 억압적인 노래일 따름이다. 말로는 생활 속에서 느끼는 즐거운 성을 주장하지만, 정작 중요한 노래에서는 성기중심주의 또는 성교중심주의를 찬양하고 있는 억압적인 성적 관념을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대학에서 주워들은 교과서적인 성해방 담론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성과 관련된 억압적인 이미지들을 강요하는 노래를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한 것이 한국의 대중문화의 수준일까. 음악과 관련된 진정성은 사라지고 문화자본의 논리만을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초라한 대중음악가의 초상과 대중문화권력의 노골적인 면모를 잠시 보았던 것 같다.

    문득 ‘할 줄 알어?’가 무척이나 구슬프게 들린다.

    입력시간 2003/03/31 16:23

  • HOM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