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데스크의 눈] 아버지와 다른 부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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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04.15 14:16:02 | 수정시간 : 2003.04.15 14:16:02
  • [데스크의 눈] 아버지와 다른 부시 대통령

    9ㆍ11 뉴욕 테러 사건 이후 국제 사회의 화두는 ‘테러’로 옮아 갔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세계화’와 ‘민족’이었다. 미국식 세계화는 원래 새뮤얼 헌팅턴 교수가 지적한 바대로 문명 충돌을 조장하는 부정적 측면과, 냉전 이후 속출한 민족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는 긍정적 측면을 갖고 있다.

    뉴욕 테러는 부정적 측면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는데, 미국은 그것을 무력으로 덮으려 하고 있다. 아프간 전쟁이 그렇고,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일단 빠르고 쉽게 바그다드를 점령, 후세인 정권 교체라는 당초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민간인들의 피해와 삶의 터전 붕괴라는 만만찮은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다.

    다만 권력 공백에 따른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면서 약탈과 방화 등 전쟁 외적인 이유로 고통 받는 이라크를 볼 때 가슴이 아프다. 특히 바그다드에서 취재 중 죽어간 기자들 소식엔 남의 일 같지 않는 동변상련을 느낀다.

    포연이 자욱한 곳으로 취재를 간다는 건 언제나 위험하다. 나 외에 모두가 적이 될 수 있는 내전이나 바그다드와 같은 시가전에선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된다. 기자를 포함해 민간인 희생이 클 수밖에 없는 것도 상대보다 먼저 총을 쏘려는, 극도로 불안한 참전 군인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이를 잘 아는 종군 기자들은 현장에 당도하면 마치 불문율이나 되듯 한 호텔에 몰려 지낸다. 이라크전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자들은 미군의 오폭 대상이었던 팔레스타인 호텔에 머물렀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한 기쁨에 젖어 있던 1996년 8월, 수도 그로즈니를 러시아측에 넘겨주었던 체첸 반군이 그로즈니 수복에 나섰다. 모스크바 특파원이었던 필자는 체첸전 취재를 준비했다. 그때 러시아 RIA노보스티 통신의 베테랑 종군 기자는 이렇게 조언했다. 기자들이 많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갈 것, 혼자 다니지 말 것, 총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나서지 말 것 등등.

    굳이 조언을 받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95년 12월 유고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 평화집행군(IFOR)이 진입하면서 세르비아계와 회교도들이 치열하게 시가전을 벌인 사라예보 취재를 간 경험 때문이다. 예비 지식 없이 유엔측이 운항하는 인도적 물품 수송기에 몸을 실었는데, 사라예보 도착 직후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카메라 한대만 매고 덜렁 내린 사라예보 공항에는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사이로 ‘저격수 위험' 경고판이 쏘아보고 있었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방탄복도 없이 내렸으니, 유엔군 병사가 “어떻게 수송기를 탔느냐”고 묻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사라예보의 보스니아 호텔이 왜 3~4개월씩 머무는 기자들로 꽉 차 있는지 이유를 알았다. 여론 때문에 세르비아계든 회교도든 기자들이 몰려 있는 곳은 공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미군이 바그다드의 팔레스타인 호텔에 총격을 가한 것은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과 다른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욕을 먹고 무리를 하더라도 목적은 달성하고 말겠다는 강한 성취욕이다.

    아버지 부시는 제1차 걸프전에서 후세인 축출에 힘을 쏟았지만 무리수는 피했다. 91년 2월15일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된 후 부시는 피의 보복을 끝내는 방법으로 이라크 국민이 스스로 후세인을 몰아내는 수순을 제시했다. 그리고 남부의 회교 시아파 세력과 북부의 쿠르드 족이 후세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군사적으로 도움을 주지도 않았다.

    콜린 파월 당시 미 합참의장은 “미군들이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고,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이라크의 레바논화를 막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하긴 시아파가 이란의 시아파와 결합해 남쪽을 장악하고, 후세인 세력의 수니파가 중부를, 독립국가 수립을 원하는 쿠르드족이 북쪽을 차지하면 이라크는 각 세력간의 분쟁으로 통제 불능의 내전 상태에 빠질 위험이 크다.

    그렇다면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위험은 사라졌는가? 미국은 이라크를 남북과 중부 등 세 부분으로 나눠 군정을 실시한 뒤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는 전후 구상을 전쟁처럼 쉽게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바그다드에서 미군을 환영한 사람들은 대부분 후세인 체제에 의해 탄압을 받았던 시아파다. 전쟁 패배에 숨을 죽인 기득권의 수니파가 시아파 득세에 반발할 것은 뻔하다.

    친미 시아파 지도자 압둘 마지드 알 코에이의 피살 사건에서 민심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라크인들이 여전히 인샬라(신의 뜻대로)를 외듯이 1차 걸프전 때나 지금이나 민심이나 주변 정세가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달라진 건 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하는 부시인데, 그는 순자(荀子)가 ‘의병(議兵)’에서 “군사를 부려 전쟁을 하는 근본은 백성(민심)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 있다”고 한 깊은 뜻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2003/04/1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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