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김동식의 문화읽기] 세대문학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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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04.23 14:24:39 | 수정시간 : 2003.04.23 14:24:39
  • [김동식의 문화읽기] 세대문학의 이해

    두 주 전쯤이었을 것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기자 U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선배, 귀여니 알죠?”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니 당연히 모른다고 이야기를 할밖에. 오히려 내 쪽에서 물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요?” 기사에 도움되는 이야기를 듣고자 전화했을 텐데 졸지에 상황이 역전됐다.

    U의 요령있는 브리핑에 의하면, 귀여니는 1985년 생으로 올해 충북제천 고등학교를 졸업한 18세의 소녀이고, 소설 ‘그 놈은 멋있었다’(이하 ‘그 놈’)는 출간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수만 부의 판매실적으로 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마감했고, 외출을 조금 서둘러 서점에서 문제의 소설 2권을 구입했다.

    제목과 표지에서 받은 느낌 그대로였다. 예쁘지도 않고 잘하는 것도 없는 평범한 여고생 예원과 양아치 스타일의 꽃미남 은성 사이의 알콩달콩한 사랑이야기였다. 작품을 읽어나가는 동안 만화 ‘캔디캔디’가 머리 속에서 계속 떠올랐다.

    예쁘지도 부유하지도 않지만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소녀 캔디와, 거칠고 반항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내면 속에는 말할 수 없는 비밀과 아픔을 가진 테리우스가, ‘그 놈’의 주인공들과 무척이나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리라. 양식(genre)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만화적인 구성과 하이틴로맨스의 문법이 고스란히 적용된 소설이니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전형적인 하이틴로맨스의 서사를 가져다 쓰고 있는 ‘그 놈’이 엄청난 판매부수를 자랑하며 대중문화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관련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사이버 문학이 본격적으로 오프라인을 평정하기 시작했다”는 어느 출판평론가의 멘트가 눈에 띄었다.

    ‘엽기적인 그녀’‘동갑내기 과외하기’ 등과 같은 인터넷 문학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져 최고의 흥행을 올린 바 있음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하지만 기존의 오프라인 문학과 구별되는 사이버 문학의 그 어떤 특징이 있어서 엄청난 흥행을 가져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그 놈’의 경우에도 눈에 띌 만한 새로운 문화적ㆍ문학적 요소는 없다.

    지금 10대들의 고민과 감성을 그들의 언어로 표현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전부터 보아오던 친숙한 양식이고 내용들이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사이버 문학은 오프라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산ㆍ수용ㆍ유통된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작가는 완성된 형태의 작품을 출간하고 독자는 신문서평과 같은 정보를 접한 뒤에 개인적인 차원에서 구입을 결정하는 것이 오프라인의 전통적인 절차이다. 반면에 인터넷 문학은 작품 연재과정에서 독자군을 형성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존재의미가 사라진다.

    ‘그 놈’의 경우 2001년 8월부터 ‘다음’의 유머게시판에 두 달간 연재했던 글인데, 편당 평균 조회수가 8만에 달했고 200개에 가까운 팬 카페가 생겼다고 한다. 현재 귀여니의 홈페이지(www.guiyeoni.com)에는 30만 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다.

    귀여니의 경우 수많은 인터넷 소설가와의 보이지 않는 경쟁 속에서 네티즌들의 선택을 받아 살아남은 작가인 셈이다. 만약 ‘그 놈’이 10만 부가 팔렸다면 홈페이지의 회원 30만 명 중에서 1/3 가량이 책을 구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이버 문학의 오프라인 진출은 단순히 작품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인터넷 소설 한 편이 책으로 출간된다는 것은, 사이버 공간에서 작품과 함께 형성된 독자군이 함께 오프라인으로 진출한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을 구입하는 일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작품을 읽는 경험이 아니라, 이미 보았던 작품을 책의 형태로 ‘소장’(所藏)하는 경험이 되는 셈이다. 귀여니 현상이 문학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출판유통과 관련된 문화현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놈’을 읽고 난 후에, 조금은 뜬금 없지만 ‘세대문학’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지금의 10대는 인터넷과 함께 자라나면서 무수한 채팅용어와 이모티콘(감정을 표현하는 기호)을 만들어 낸 세대이다. 그 세대가 자신들의 언어로 자기세대의 고민과 감성을 표현하고 또 그렇게 씌어진 작품을 공유해 가는 경험을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기성세대로서 유념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놈’과 관련된 문화적 현상을 사회병리적인 시선에서 파악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놈’에 열광하는 모습을 10대 전체의 이미지로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다. 어른의 도덕주의적인 관념과 상업주의적인 시선이 아니라면, 그들은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한 권의 소설과 함께 지나올 테니까 말이다. 유치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독서체험이었다.

    입력시간 2003/04/2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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