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추억의 LP여행] 이난영(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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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05.29 16:23:59 | 수정시간 : 2003.05.29 16:23:59
  • [추억의 LP여행] 이난영(上)

    1969년 한 시민의 성금으로 유달산에 세워진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대중가요로는 최초로 탄생된 노래비였다. 귀에 감기듯 애절한 콧소리로 민족의 울분을 노래했던 ‘목포의 눈물’의 주인공은 고(故) 이난영. 그녀의 노래는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족의 슬픔과 울분을 대변하는 한의 가락이었다. 그래서 대중가수로는 드물게 민족가수로까지 추앙을 받았다.

    그녀는 또 작곡가인 남편 김해송과 함께 한국 최초의 뮤지컬 악단 ‘KPK악단’을 창립, 우리 땅에 새로운 음악을 수혈한 개척자였다. 해외에서 명성을 날렸던 최초의 보컬 그룹 ‘김씨스터즈’와 ‘김보이스’를 키워낸 억척스런 어머니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이난영은 불행했다. 남편은 납북돼 생이별을 했고 홀로 남은 자신을 보살펴준 가수 남인수는 병으로 떠나보냈다. 비련의 여인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그래서 더욱 잊을 수 없는 ‘트로트 명곡’으로 불려진다.

    이난영(본명 이옥례)은 1916년 전남 목포 육전거리의 허름한 초가집에서 1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일자무식에 소문난 술주정꾼. 농사철이면 품앗이로 연명해야 하는 가난한 집이었다.

    그래도 예술적인 ‘끼’와 ‘능력’은 타고 났는지 두 살 위인 오빠 봉룡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작곡가로 컸다. 그는 보통학교를 거쳐 2년제 심상고등과를 마친 뒤 목화공장의 직공으로 가계를 도왔고 이난영은 목포 공립보통학교를 4년 다닌 게 학력의 전부다.

    어려서부터 노래 잘 부르는 꼬마 가수로 소문났던 그녀는 유성기 소리를 듣기 위해 일본인 집에 보모를 자청해 들어갔다. 매일 유성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녀의 노래 재질을 알아본 일본인 주인은 순회 극단의 공연무대에 막간 출연을 주선해 주었다.

    16살이 되던 1932년 어느 날, ‘태양극단’의 목포 공연 때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정식 가수는 아니고 막간 가수였다. 박승희 단장은 그녀의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서 극단의 일원이 되었다. 박 단장은 ‘이름이 촌스럽다’며 난영이란 예명을 지어 주었다. 태양극단의 막내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8개월 간 전국을 돌던 중 일본 오사카로 공연을 떠났는데, 갑자기 일본에서 극단이 해산돼 버렸다.

    갈 곳 없는 이난영은 변두리 극장 분장실에 기숙해야 했다. 돌아갈 차비도 없어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그때 구세주가 된 사람은 오케이 레코드 사장 이철씨. 일본의 조선 레코드 특약점 주인이 이난영이라는 가수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자 귀가 번쩍 뜨인 이철은 수소문 끝에 떠돌고 있던 그녀를 찾아냈다. 직접 노래실력을 테스트한 후 1933년 오케이 레코드의 전속 가수로 그녀를 스카웃했다.

    데뷔 SP 음반은 1933년 10월 발표된 ‘향수’다. 그녀의 노래가 처음 수록된 음반은 그 해 8월 태평레코드에서 발매한 창극 춘향전전집 SP음반(총 5장)이다. 여기에는 그녀의 첫 육성노래 ‘시들은 청춘’이 담겨 있다.

    33년 11월 발표한 ‘불사조’는 이난영의 첫 히트곡. ‘불사조’에 이어 이듬해 2월 발표한 ‘봄맞이’가 또 다시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는 단숨에 촉망 받는 신인가수로 떠올랐다. 그 해 가을 도쿄에서 열린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한국인 가수로는 혼자 출전했는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34년 조선일보에서 전국 6대 도시의 ‘애향가’가사 모집을 했다. 3,000여 편의 응모작품 중 목포 출신 문일석이 응모한 ‘목포의 눈물’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이 철 사장은 때 마침 멜로디가 마음에 들었던 손목인 곡 ‘갈매기 항구’에 이 가사를 얹어 이난영에게 취입시켰다. ‘갈매기의 항구’는 원래 남자 가수 고복수를 위해 만든 곡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뀐 ‘목포의 눈물’은 35년 이난영을 ‘가요계의 샛별’로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 만장이 날개 돋힌 듯 팔렸다고 한다. 지금에야 100만장 판매를 우습게 이야기 하지만 유성기 시대에 수 만장은 대박 중의 대박이었다.

    ‘목포의 눈물’은 대 히트와 함께 목포 사람들의 자존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한 민족에게는 설움을 달래주는 민족 가요로 널리 불렸다. 이 인기를 바탕으로 이난영은 36년 ‘오카란코’란 일본 예명으로 일본 가요계에 진출해 데이지쿠 레코드에서 ‘이별의 뱃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목포의 눈물’ 일본어 버전이다.

    이난영은 37년 11월, 21살의 나이에 김해송과 결혼을 했다. 부부는 9남매를 낳았는데 두 자녀는 일찍 세상을 등졌고 맏딸 영자, 영조, 숙자, 영일, 상호, 태성 등 7남매는 후에 ‘김씨스터즈’와 ‘김보이스’라는 걸출한 대중음악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1940년까지 왕성한 음반 발표를 한 이난영에게 그 해 7월에 발표한 오빠 이봉룡의 곡 ‘목포는 항구다’가 마지막 히트곡이었다.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생필품조차 부족한 현실 때문에 음반 제작보다는 무대공연 위주로 활동을 했다.

    당시 그녀가 소속된 조선악극단은 오케이 레코드 직속으로 당시 최대 규모의 공연단체였다. 그녀는 가요사상 처음으로 여성보컬그룹 ‘저고리씨스터즈’를 결성, ‘조선악극단 무대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hoi@hk.co.kr

    입력시간 2003/05/29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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