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어제와 오늘] 두 아들이 본 두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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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06.10 15:25:43 | 수정시간 : 2003.06.10 15:25:43
  • [어제와 오늘] 두 아들이 본 두 아버지

    노무현 대통령은 2일 ‘취임 1백일’ 기자회견에서 얼굴을 붉혔다. “이기명 선생이든 건평씨든 잘못이 있으면 책임지겠다. 위법이 있으면 처벌 받겠다. 조사해서 처벌 하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날 대검 중수부에 출두하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의원의 거동은 보기 안쓰러웠다.

    나라종금으로부터 1억원이상 로비자금을 받고 금융기관에 청탁했다며 검찰이 내건 혐의에 그는 병든 몸으로 ‘모호한 몸짓’을 했다.

    ‘취임 1백일’과 ‘퇴임후 1백일’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뉘앙스가 다르다. 두 장면을 지켜 보며 또 다른 두 사람을 생각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1백여일만에 ‘인민주의의 적’으로 처형된 아버지 라브렌치 베리야(1898-1953. 내무인민위원회(NKVD)의장)에게 퍼부어 졌던 ‘스탈린의 백정’이란 오명을 벗기기 위해 진력한 그의 아들인 핵물리학 박사 세르고(1924년생).

    1964년 10월 크레믈린을 쫓겨난 니키다 흐루시초프(1894~1971. 소련 공산중앙위 제1서기수상)의 진심을 세계에 이해시키려 노력한 핵 물리학 박사 세르게이(1935년생. 1991년 미국으로 이민. 현재 미국 시민으로 브라운대 교수). 아버지에 대한 두 박사의 효성(?)도 유별났다.

    세르고 베리야는 1953년 6월 23일 아버지의 차를 타고 출근했다. 아버지 베리야는 그날 하오 2시께 열린 간부 회의에서 ‘인민의 적’으로 체포됐다. 이어 열린 6월 27일 회의에서 아버지 베리야는 흐루시초프의 고발을 시인했다.

    ‘스탈린 치하에는 굉장한 음모가에다 교활한 출세주의자였으며 자신의 더러운 손으로 스탈린 동지의 영혼을 빨아 들였다’며 ‘자신의 생각을 스탈린에게 주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즉, 인민의 적이요 볼셰비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르고는 그후 2001년 ‘내 아버지 베리야;스탈린 시대 크레믈린의 내막’을 써 책으로 펴냈다. 아버지 사후 48년만에, 55살에 죽은 아버지보다 21살이 더 먹은 나이에, 아버지를 위한 변호서를 낸 것이다.

    아버지 베리야는 권총을 휘두르며 비밀경찰 우두머리를 하는 것보다 역사책 읽기를 더 좋아했다. 레닌보다는 스탈린을 더 존경했다. 스탈린은 실용주의자였고 조직력이 강했다. 음모를 좋아했고, 권력을 유지하는 최고의 술수로 후계자 간에 상호 의심의 분위기를 조장, 서로 서로 시기와 고발을 유발시켜 교묘한 평형을 이루게 했다.

    아버지 베리야는 스탈린이 1945년 전후 세계를 정복하려 했다고 보았다. 1950년 스탈린 말기에 아버지 베리야는 아들에게 볼셰비즘은 러시아에는 적합치 않는 체제이며 이는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스탈린이 죽고난 뒤, 베리야는 개혁과 개방으로 가려 했으나, 스탈린 치하의 잔혹 정치를 추종하는 다른 간부들 때문에 결국 ‘진심의 정책’을 펴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엘친 대통령의 역사 자문관으로 ‘크레믈린의 수령들-레닌에서 고르바초프’를 쓴 드미트리 볼코고노프(예비역 대장.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스탈린 사후 어느 정도 테러 정치 제한, 교정노동수용소(Gulag) 재조정, 대(對)유고 관계 개선, 동독에 체제선택권 부여 등의 문제로 고민을 했지만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리야의 개혁안에 대해 그는 “손가락 끝으로 끄적거려 본 것에 불과하다. 베리야는 절대적으로 개혁적 인물이 아니다”라며 그의 생애 마지막 저작이 된 ‘수령들’에서 1995년에 썼다. 그래서일까, 러시아 대법원은 2000년 5월 “베리야가 선고 받은 ‘외국의 첩자와 반소비에트 혐의는 재심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후 세르고는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의 프랑스와 톰 교수와 함께 베리야의 속마음과 고민을 추적,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판결문을 쓴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살아 남은 유일한 아들인 세르게이에 대해 무척 엄격했지만, 많은 것을 상의하는 좋은 부자 관계였다. 일화가 있다.

    1938년 흐루시초프가 우크라이나 제1 서기일 당시 점심 식사 자리에서였다. 세살바기 세르게이는 먹던 빵을 조각 내 바닥에 던졌다. 당시 44살이었던 아버지는 가볍게 아들의 머리를 쥐어 받는 어머니 아들을 보더니, 벼락같이 고함쳤다. “이놈! 그 부스러기를 다 주워!” 당시 우크라이나는 심각한 기근속에서 빵을 열망 하고 있었다.

    흐루시초프가 1964년 10월 실각하기 직전이었다. 소련 육우학의 권위자인 아들 리첸코와 식사를 할 때였다. 70세의 그는 “소를 크게 길러야지. 초파리나 연구하는 육종학은 필요 없다”고 했다.

    이에 29살의 아들은 “누가 종(種)의 실체를 보았습니까. 원자의 실체를 보았습니까. 그래도 실험을 해야 핵과학이 발전합니다.” 한번도 가족에게 고함을 친적이 없는 흐루시초프는 소리 쳤다. “어떻든 초파리 육종학은 필요 없어!”

    이런 흐루시초프를 두고 볼코고노프는 이렇게 평했다.

    “용감하면서도 논리에 일관성이 없는 충동적이고도 예견의 능력이 없는, 그러면서도 어떤 영역에서는 변화와 개혁을 지속시키려는 그러한 수령이다.” 세르게이는 이런 평에 앞서 1990년 ‘아들 흐루시초프가 본 아버지 흐루시초프’라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결론 내리고 있다. 세르게이에게 아버지는 고르바초프가 1986년 ‘비스탈린 선언 20주년’에 말했던 것처럼 “스탈린적 사상 구조물을 무너뜨리려는 모험가였고, 정치적 용기를 가진 수령”이었다.

    세르게이의 노력은 계속됐다. 1970년 ‘흐루시초프는 말한다’, 73년 ‘흐루시초프 회고록’, 90년 ‘봉인되어있던 증언’들을 서방에서 발간해 아버지의 진심과 참모습을 알리려는 ‘효심’을 발휘했다. 우리의 대통령 아들들이 살펴 볼 책이다.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레닌 이후 7명의 수령을 비판한 볼코고노프의 이말도 기억 해야 한다. “역사의 판결에 대해서는 공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3/06/1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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