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이순신장군 순국 400주년] 이순신 장군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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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8.10.15 14:41:00


  • 이순신 장군은 평생 무인이었다. 세종때 북진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 등 훌륭한 옛 명장들이 대부분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던 반면 그는 무과 급제자로 군문을 떠난 적이 없다. 잠시 정읍현감을 지낸 기간을 빼고는 말이다.

    그러나 유학을 토대로 한 그의 인문적 교양은 어지간한 시인묵객도 따르지 못할 바였다. 특히 위기의 시대와 인간적 고뇌를 씨줄과 날줄로 탁월한 시를 엮어낸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난세를 당당하게 살아간 한 인간의 참모습을 여실히 증언한다.

    아침에 흰 머리털을 여러 오라기 뽑았다. 흰 머리털이 무엇이 어떻겠는가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난중일기’ 1593년 6월 12일자에서)

    충남 아산에 두고온 노모 그리는 마음이 절절하다. 장군의 부모 생각하는 마음은 난중일기를 비롯, 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전쟁통에도 매년 5월 4일 어머니 생신날에는 쓰라린 감회를 잊지 않았다. 예를 들면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멸하는 일 때문에 가서 헌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된다” 등등.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장수들은 살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 명령을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군법으로 처단할 것이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자. 명량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 기록이다)

    “죽고자 하면…”은 오기(吳起)의 병법에 “필사적으로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히 살려고만 하면 죽게 된다”를 약간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나와 율곡(이이)이 같은 성씨라 만나 볼 만도 하나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 만나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이순신의 이름을 듣고, 또 종씨임(둘다 덕수 이씨로 이이는 이순신의 19촌 조카뻘)을 알고 유성룡을 통해 한번 보자고 했다. 어릴 적 친구로 후일 이순신을 요직에 추천하는 유성룡이 이 말을 듣고 한번 가보라고 권하자 이순신은 이렇게 답했다. 그의 강직함을 일찍부터 엿볼 수 있다.

    석자 칼로 하늘에 다짐하니 산과 물의 빛이 떠는도다/한번 휩쓸 제 핏물이 산과 강에 얼룩지리라(이순신 장군이 쓰던 길이 197.5㎝짜리 두 자루 긴 칼에 각각 새겨진 시구. 무인의 각오를 가늠케 한다.)

    이순신 장군의 시는 음풍농월하는 문신들의 그것과 격을 달리한다. 그 속에는 시대를 고민하는 대장부의 체취가 물씬하다.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왕자들은 북쪽에서 위태로운데/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장사(壯士)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바다에 서약하니 용이 느끼고/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네/왜적을 모조리 무찌른다면/이 한 몸 이제 죽는다 마다하리요(진중에서 읊다·陣中吟)

    임진왜란이 나자 국왕 선조는 명나라 접경지역인 평북 의주로 달아나고 광해군등 왕자들은 함경도 등에서 임시정부를 꾸리는 상황이 됐다. 누란의 위기를 맞아 그의 다짐이 의연하기만 하다.

    한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찬 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새벽달 창에 들어 칼을 비치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큰 칼 옆에 차고 긴파람 하는 차에/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포성이 채 가시지 않았을 그 잠 못 드는 밤, 주둔지 망루에 홀로 앉아 한 자락 떠가는 피리 소리에 가슴 저미는 심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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