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이순신장군 순국 400주년] 아직도 그치지 않는 죽음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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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8.10.15 14:31:00


  • 이순신 장군의 생애에서 죽음의 순간처럼 드라마틱한 부분은 없다.

    조카 이분(李芬)이 쓴 충무공 행장(行狀·죽은 이의 일생을 기록한 글)은 그 순간을 생생히 전한다.

    <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이순신이 한창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이순신은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활을 쥐고 곁에 섰다가 울음을 참고 서로 하는 말이, “이렇게 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소리를 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 적들이 또 기세를 얻을 지도 모릅니다.”“그렇다. 게다가 시신을 보전해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그렇습니다. 전투가 끝나기까지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시신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순신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희와 완, 세 사람만이 알았을뿐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이 대목은 후일 각종 전기에서 약간씩의 포장을 더하면서 그의 죽음을 신화화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예기치 못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순국론에서부터 전사를 스스로 택했다는 자살론과 당시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고 숨어서 일흔까지 살았다는 은둔설까지….

    거북선 연구의 권위자인 남천우 박사(66·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유물의 재발견’(학고재 발행, 97년)에서 “이 대목은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한다.“이 행장의 저자는 전사 현장에 있었다는 완의 친형으로 당시 상황을 잘 모르고 쓴 글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용은 연극의 대사라면 모르거니와 실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허위의 내용들이다. 총에 맞고 나서 처음에는 필요한 말을 제대로 하였으나 곧바로 죽었다는 대목도 이상하지만 전투가 한창일때 총사령관 주위에 군인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다시 전사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선조실록’ 31년 11월 무신일(戊申日)조 기록은 그 순간을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사관(史官)이 말하기를… 순신이 스스로 왜놈들을 쏘다가 적탄에 가슴을 맞아 배 위에 쓰러지자 그 아들이 곡하려 하므로 군심(軍心)이 어지러워지려 하였다. 곁에 있던 이문욱이 울음을 저지시키고 옷으로 공의 시신을 가린 뒤 그대로 북을 울리며 나가 싸우매… 사람들이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무찔렀다고 하였다.”이문욱은 당시 일본어 역관으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순간 임기응변을 발휘해 공을 세운 인물.

    특히 선조실록 31년 12월 25일자는 이문욱만이 시신을 가린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노량해전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이룬 것으로 불행히 탄환을 맞자 군관 송희립 등 30여명이 상인(喪人·아들과 조카)의 입을 막아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군사를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모든 배가 주장(主將)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도원수(都元帥·조선군 총사령관)였던 권율 장군도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조사보고서에서 “이순신이 죽은 뒤에 다행히 손문욱(이문욱) 등이 마침 지혜있게 일을 처리하여 (우리 군사들이) 죽을 각오로 싸웠사옵니다”고 적고 있다. 실록의 두 기록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장학근 해군사관학교 교수(한국사)는 이분의 행장과 이에 근거한 후세의 기록은 “후세인들이 이순신의 애국충정을 강조하기 위한 미화의 흔적”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자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당시의 정황과 몇가지 사료를 근거로 제시

    한다. 우선 수도까지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가려 했던 무능한 국왕 선조가 취약한 정치적 입지때문에 백성의 추앙을 받는 이순신을 극도로 미워했고 조정 여론도 이순신에게 불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는 정황이 자살설을 뒷받침한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끝나면 자신이 정치적 희생양이 될 것으로 판단해 전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순신 자살론을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신빙성 있는 사료는 이순신과 연합함대를 구성해 노량해전을 치른 명나라 해군 제독 진린(陳璘)의 제문이다. “평시에 (이순신이) 사람들을 대할 때 말하기를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 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하시더니 이제 나라를 이미 찾았고 큰 원수마저 갚았거늘 무엇 때문에 오히려 평소의 맹세를 실천해야 하셨던고?”라고 썼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아끼던 부하인 유형은 행장에서 “평소에 속마음을 토로하며 말하기를 ‘예로부터 대장이 전공을 인정받으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날 죽음으로써 유감될 수 있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 물고 뜯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순신 자살론을 본격 제기한 것은 숙종때 사람 이민서가 쓴 ‘김덕령 장군 전기’다. 이 글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 장군이 반역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당한 이야기를 전하는 가운데 이순신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덕령)장군이 죽고부터 여러 장수들이 모두 저마다 스스로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했던 것이니 저 (의병장)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산 속에 숨어 화를 면했고 이순신도 바야흐로 전쟁중에 갑옷을 벗고 앞장서 나섬으로써(免胄先登) 스스로 탄환을 맞아 죽었으며….”

    그러나 진린의 제문은 글의 성격상 이순신 장군의 애국정신과 용맹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오직 한 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라는 구절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봐야한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이민서의 글도 이순신이 과연 당시 갑옷을 입지 않았는지, 조선 해군 장수가 전투시 갑옷을 입는 것이 관행이었는지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논거가 박약하다는 반론이 많다.

    장 교수는 “사약을 받아도 궁궐쪽을 향해 배례를 한 후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후원자인 유성룡의 파면과 고문받아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며 “순국임에 틀림없다”고 밝혔다.

    한편 남 박사는 자살론과 달리 은둔설을 주장한다.“이분의 행장에 따르면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바다에서 죽었고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져 다음해 2월 11일 죽은지 80일만에 장례를 치른다. 그후 15년이 지난 1614년에 600㎙ 떨어진 곳에 이장한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은 나흘후인 11월 23일 선조에게 보고되는데 이 때는 전쟁이 끝난 후이며 장례비도 국가에서 대주었으므로 장례를 늦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80일이나 지나 치른 것도 이상하고 15년 후에 이장한 것은 더더욱 이상하다. 이때 비로소 이순신이 죽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장례를 다시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분은 어쩌면 자신의 기록을 통해 이순신이 실제로는 일흔살까지 살았음이 밝혀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순국설이 정설이지만 국가전란속에서도 그치지 않았던 당쟁속에서의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런저런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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