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이순신장군 순국 400주년/인터뷰] 박재광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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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8.10.15 14:33:00


  • 이순신 장군 순국 400주년을 맞아 문화관광부는 12월 3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의 전략 전술’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연다.

    이 회의를 기획중인 전쟁기념관 박재광(35) 학예연구관을 만나 이순신 장군 연구 현황 등에 대해 들어봤다.

    -한국 일본 중국의 임진왜란 연구 현황을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일본은 임진왜란의 개별 전투사를 상세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군수 통신 위생등 각 분야에 걸쳐 임진왜란을 치밀하게 조명해왔습니다. 중국은 연구가 많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정치·경제·사회사를 위주로 한 통사의 일부로 다룬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누가 어떻게 싸워 이겼고 이래서 공이 제일 크다는 식으로 전승 인물을 중심으로 한 현양사업 차원의 연구에 많이 치중해 있습니다. 앞으로는 좀더 각 전투 단위로 분석적 시각에서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이번 학술회의도 그런 차원에서 당시 조선 수군의 무기와 전술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전술학의 대가인 손자도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고 했을 뿐인데 이순신 장군은 백전백승했습니다. 이유가 어디 있다고 보십니까.

    “우수한 무기체계와 탁월한 전술이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당시 일본군은 조총등 무기 면에서 앞서지 않았습니까?

    “해전에서는 달랐습니다. 우선 우리 전함이 우수했습니다. 주력함인 판옥선(板屋船)은 일본 배에 비해 크고 튼튼했습니다. 갑판을 위 아래 두 개로 해서 노꾼이 있는 공간과 전투원이 싸우는 공간을 나눴지요. 또 포를 탑재해 적선과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포격을 가하는가 하면 근접전에서는 부딪히면서 적선을 깨뜨렸습니다. 상대적으로 일본 배는 허약했지요. 특히 거북선은 임란 기간을 통틀어 3척밖에 안됐지만 선봉·돌격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적진 한 가운데로 치고 들어가 포를 쏘고 좌충우돌하며 부딪혀 적선을 깨부수는 역할을 했지요. 거북선이 전체 전투를 좌우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상당한 몫을 했고 특히 전투 초기 사기 앙양에 큰 효과를 거뒀습니다.”

    -일본 해군에는 대포가 없었나요?

    “거의 없었고 있었다 해도 성능이 열악했습니다. 또 일본 배 자체가 우리 배처럼 강력한 포를 탑재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 못했지요. 일본 해군은 배를 가까이대고 적선에 뛰어 올라 백병전을 하는 근접전 전술을 구사했지요. 반면에 우리 수군은 원거리 포격전 위주였습니다. 천자(天字) 총통(銃筒) 등 각종 포는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훨씬 길고 위력이 대단했습니다. 요즘 대포처럼 탄착지점에서 폭발하는 포탄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대장군화살, 철환(鐵丸), 불화살 등을 발사해 적선을 깨뜨리거나 불태워 침몰시켰습니다. 조란탄(鳥亂彈)이라고 해서 작은 쇠구슬을 수십, 수백개씩 한꺼번에 발사해 적군을 살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화포류는 고려말 이후 꾸준한 무기개량의 성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유명한 학익진(學翼陣)같은 것은 이순신장군의 독창적인 전술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의 전술 가운데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든 것은 없습니다. 학날개 형태의 진이나 첨자진(尖字陣), 일자진(一字陣) 등은 모두 이미 오래 전부터 지상전에서 사용하던 것이지요. 문제는 그때그때의 지형이나 여건에 맞게 전술을 절묘하게 응용했다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 각 지역의 형태나 기상조건, 바다의 조건 등을 세밀히 연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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