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이순신장군 순국 400주년] 말 많고 탈도 많았던 현양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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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8.10.15 14:35:00


  • “죽으면 죽으리라”던 이순신 장군은 죽어 다시 살아났다.

    사후 400년동안 줄기차게 이어진 후세인들의 추모가 그를 늘 현재의 화신으로 되살린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국왕 선조는 그를 일등공신에 책정하는 등 국가보훈 차원의 온갖 조치를 취한다. 이어 인조 21년(1643) 3월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정조 17년(1793)에는 영의정이 추증된다.

    특히 정조대왕은 신도비(神道碑·국가유공자의 생애를 기록한 비) 비명을 직접 짓는가 하면 이순신 장군 본인의 글과 관련 기록을 모두 모은 ‘李忠武公全書’를 정부 명의로 발행(1795년)토록 했다. 정조의 비명은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충무공을 위해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가 비명을 쓴다 하랴“로 시작된다.

    조선조 말까지 진행된 이런저런 현양사업들은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훈을 철저하고도 다양하게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국가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양사업은 일제강점기와 해방후에도 간간이 이루어졌다.

    특히 1960∼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적극 추진해 군인정신의 표상이자 구국의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무리한 일도 많았다. 68년 충무공 탄신일에 맞춰 서울 광화문에 세운 충무공 동상은 칼을 오른쪽에 차고 있는 것을 비롯, 고증이 거의 안돼 제막식 당일부터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66년 문공부가 추진한 현충사 성역화 사업에서도 단청을‘육영수색’으로 통하는 미색으로 칠해 국적불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무리한 현양사업의 압권은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발족한 해사 소속 충무공 해전유물발굴단이 96년 가짜 총통(화포)을 거북선에서 쓴 것이라고 조작한 사건이었다.

    문화관광부는 올해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맞아 지난 4월부터 지속적으로 동상 건립, 학술세미나, 한산대첩 재현, 오페라 공연 등 여러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IMF 탓인지 아니면 홍보부족 때문인지 올해가 순국 400주년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별로 없다.

    이들 현양·추모사업은 나름대로 국민 교육 효과를 거뒀으나 정작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관한 연구·기록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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