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이순신장군 순국 400주년] 다시, 이순신장군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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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8.10.15 14:37:00


  • 다시, 이순신 장군을 생각한다.

    오는 12월 16일은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순국한지 꼭 400주년 되는 날이다. 400년전 인 1598년 음력 11월 19일. 그는 노량해전에서 일본 함선 500여척과 접전, 200여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전투가 한창일 무렵 열심히 싸움을 지휘하다가 적의 흉탄을 맞고 선상에서 산화했다. 이 해전으로 7년에 걸친 임진왜란(1592∼1598)은 일본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다시 수많은 세월이 흘러 지금 그의 후손들의 나라 한국은 IMF관리시대다.

    IMF에 다시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은 구국의 영웅, 민족의 은인만은 아니다. 동북아에 유례없는 대규모 국제전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IMF를 극복할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노병천(43·육군 중령) 미국 지휘참모대학 교환교관은 최근 발행한 ‘완전한 승리-이순신의 18해전과 7대 전승 비결’에서 그의 군사전략가로서의 탁월함을 이렇게 지적한다. “적선을 359척이나 격파하고 적군을 3만4,000명이나 도살해놓고도 아군은 단 한 척의 배도 손실이 없었던 전투가 과연 이 세상사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순신은 1592년 네 차례의 출전에서 정확히 33일동안 왜선 359척을 박살냈고 왜군 3만4,000명을 손상시켰다. 그러면서도 단 한 척의 배도 왜군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이런 기록은 세계 어느 해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보물과 같은 기록이다.”

    이순신 장군의 탁월함은 일찍이 외국인들도 인정한 바이다.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1905년 2월 대마도해협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무찌른 뒤 이를 축하하는 피로연 자리에서 자신을 영국의 넬슨과 조선의 이순신에 비겨서 칭찬하는 축사를 듣고 답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넬슨에게 비기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도고는 일본 근세사상 최고의 해군명장으로 꼽히는 인물. 또 영국학자 G.A. 발라드는 ‘해양이 일본 정치사에 미친 영향’(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이라는 저서에서 “영국 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될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한번도 패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이순신의 탁월함의 비밀이야말로 우리가 찾으려는 IMF를 헤쳐나갈 수 있는 슬기다. 정치가든 기업가든 직장인이든 각기 맡은 분야에서 그의 지혜를 얼마든지 빌릴 수 있겠기 때문이다.

    기록에 드러나 우리의 눈길을 잡아당기는 것은 화려한 승전 내용이지만 그 이면에는 숨은 준비가 많았다.

    우선 그는 인화를 중시했다. 정신적 에너지까지를 포함해 인적 역량의 집결이 발휘하는 놀라운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늘 아랫사람의 의견을 잘 듣고 최대한 중지를 모았다. ‘아무 소리 말고 나를 따르라’는 식이 전혀 아니었다. 한산대첩과 명량대첩 전날의 작전회의는 규율있는 토의문화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일단 어떤 결정이 내려지면 이론을 달거나 따르지 않는 부하들은 엄벌로 처단했다. 이순신이 서울 살 때 어릴 적 친구이자 유력한 정치적 후원자였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런 면모를 잘 증언한다. “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運籌堂)이란 집을 짓고 밤낮을 그곳서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병사(兵事)를 의논했는데 하급 졸병이라도 말하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와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여 군정(軍情)을 통하게 했다. 또 전쟁을 하려고 할 때는 매번 부하 장수들을 다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물어 작전계획을 정한 뒤에 싸움을 결행했기 때문에 패하는 일이 없었다.”구조조정을 빙자해 미운 사람 자르고 직원들 겁주기에 골몰하려는 경영자가 있다면 새겨 들을 대목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진심으로 새겨듣는 자세에서 얻은 것이 바로 거북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나기 1년여전인 1591년 2월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정3품으로 전라좌도 지역 해군사령관)로 부임하자마자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휘하 장수 나대용이 태종때 구선(龜船)을 만들어 임진강에서 왜구의 배와 모의접전한 사실이 있음을 들어 거북선 건조를 건의했다. 이순신은 이 건의를 흘려듣지 않았다. 즉시 온갖 지혜를 짜내 돌격용 거북선을 건조시켰다. 거북선 건조는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개량한 것과 함께 끊임없이 무언가를 개선하고 좀 더 나은 해결책을 찾으려는 그의 혁신정신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순신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하는 인물이었다. 1592년 3월 5일자 난중일기를 보면 당시 좌의정 유성룡으로부터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중국의 새 병법서를 선물받고 “만고의 기서”(奇書)라고 감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이런 병서를 통해 평소 육전, 해전, 화공전(火攻戰) 등의 전술을 깊이 연구했다.

    혁신은 전술 면에서도 이루어졌다. 노 교관은 순수 함포전을 이순신의 혁신적인 전술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하고 “후일 일본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의 니미츠 제독이 사용했던 원거리 함포사격 방식과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원거리 함포전은 가까이 붙어서 접전을 하지 않으므로 조선의 전함이 거의 손상을 입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단 한척의 배도 망실당하지 않았고 백병전없이 결말을 보아 병사들의 희생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특히 함포전을 하되 집중사격권을 형성했다. 이 권내의 살상범위 안에 적이 들어오면 그야말로 묵사발이 되도록 무서운 집중사격을 가했다. 이러한 집중사격 방식이 진가를 발휘한 해전이 바로 명량해전이었다.”연구와 혁신 없는 승리는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항상 적보다 먼저 생각하고 적보다 먼저 움직여서 유리한 위치에서 적을 유인해낸 뒤 느닷없이 들이쳤다. 그러기 위해 그는 지피지기에 철저했다. 늘 적정을 정탐하고 척후를 띄우고 전투지형파악에 열심이었다. 그는 한번도 기습을 당한 적이 없다. 적의 기습시도는 그때마다 철저히 분쇄했다. 적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명량해전에서는 울돌목의 좁은 지점에서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시점을 절묘히 이용해 13척의 배로 200척의 왜군을 물리쳤다. 경쟁상대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는 기업이 어떻게 자본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가.

    그의 이런 승리의 비법 아닌 비법은 타고난 재능이기도 하지만 평소부터 습관화된 노력 덕분이었다. 평소의 노력과 실천으로 준비하지 않았다면 다급한 전투의 순간에 어떻게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겠는가.

    IMF에 다시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은 우리들 가슴을 뭉클하게하는 인간적 체취로도 되살아난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이 누구시던가. 나라엔 충성하고 부모엔 효도하고 형제들과 우애있고 자녀들을 사랑하고 백성을 보살피고… 한 그런 위인 아니신가? 완벽한 인간의 표본처럼 인식돼온 그의 인간적 면모는 후세인들이 덧붙인 그 화려한 온갖 찬사의 느끼함만 빼면 전혀 사실 아닌 것이 없다. 현대인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그렇게까지야 했겠느냐 할 수도 있지만 어려서부터 윤리적 실천을 중시하는 유교 교육이 몸에 밴 당시 조선의 관리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살았던 조선의 할아버지들을 얼마든지 꼽을 수 있다. 다만 그런 면모를 후대인들이 너무 미화하다보니 원균 장군과의 불화 같은 사소한 인간관계의 측면조차 오히려 선선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감이 있다.

    난중일기의 한 대목에서 그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들어보자. “(1597년) 10월 14일 맑음. 새벽 두 시쯤 꿈에 말을 타고 가는데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으나 쓰러지지는 않고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고 있는 것같은 형상이었는데 깨어났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이윽고 나는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꼬!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

    셋째 아들 면은 이순신의 고향인 충남 아산에서 이해 9월 16일을 전후해 북

    진중인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스물하나의 꽃같은 나이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쉬흔둘의 젊지 않은 나이에 전장을 누비는 이 노장군에게 아들의 죽음이라니,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전형적인 무인인 이 불세출의 장군을 괴롭힌 것은 병마였다. 곽란(심한 통증과 구토를 동반하는 신경성 위장장애)은 전쟁기간 내내 고통으로 달려들었다. “(1597년) 8월 21일 맑음. 새벽에 곽란을 일으켜 몸을 차게 하면 안되겠다 생각해 소주를 마셔 가라앉히려 했으나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다. 거의 살기 힘들 지경이다. 구토하기를 십여차례 밤이 되어도 고통은 여전하다. 8월 23일 맑음. 병세가 지극히 위태롭다. 배는 불편하다. 실로 전쟁터만 아니었다면 하선하여 뭍에 묵고 싶다.”

    위대한 장군, 성실한 아버지, 착한 아들 이순신….

    IMF에 순국 400주년을 빌미로 다시 생각해본 이순신 장군은 그런 모습으로 다가온다. IMF와는 비교도 안되는 그 참담한 전쟁통에도 인간적인 따스함을 전혀 잃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본다. 나폴레옹도 칭기즈칸도 군사적 영웅이었건만 그런 희망은 주지 못한다. 전혀. 하여, 다시 이순신 장군을 생각한다.

    이광일·주간한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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