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종가기행 37] 迎日 鄭氏 松江 鄭澈(영일정씨 송강 정철)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플러스 네이버 북마크 싸이월드 공감 기사 구입 프린트 기사메일
입력시간 : 2007.02.28 14:06:10 | 수정시간 : 2007.02.28 14:08:31
  • [종가기행 37] 迎日 鄭氏 松江 鄭澈(영일정씨 송강 정철)
    16대 종손 정구성(鄭求晟) 씨… 산중 외딴 종택 지키며 사명감으로 종손 도리 다 해
    넉넉치 않은 살림에도 제사·유물관리 철저… 기념관·사당은 郡에서 관리

    종택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鳳竹里) 환희산(歡喜山, 본래의 이름 地藏山) 자락에 자리잡은 송강(松江) 정철(鄭澈) 선생의 종택을 찾았을 때는 전날 내린 눈 때문에 포근함마저 느껴지는 겨울이었다. 집 안채에 걸려 있는 ‘관동재(寬洞齋)’라는 현판이 객을 맞는다.

    너그럽다는 뜻의 ‘관(寬)’은 군자가 가져야 할 마음. 예전에는 사람의 이름은 물론 마을, 아호, 궁궐 이름에도 널리 쓰였다. ‘관즉득중(寬則得衆)’. 즉 너그러우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 ‘관’자를 종가의 당호로 지은 연유가 궁금했다. 행여 송강 선생의 행적과 관련이 있는지 물었더니 마을 이름이 그러해서라고 한다.

    사실 역사 기록으로 보면 송강의 이미지는 너그러움보다는 굳건함이나 강직함에 가깝다. 특히 군자와 소인의 구분이 분명해 주위에 많은 적을 많이 만들었고, 그 결과 무고를 당해 오랫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여하튼 송강은 초지일관 신념을 가지고 일을 처리했다. 우국애민으로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16대 종손 정구성씨
    밤은 깊은데 나그넨 잠 못 들고(深夜客無睡)
    남은 생애라 시름만 더해지는 걸(殘生愁已生)
    술잔 보고서는 멈추어지질 않으니(當杯莫停手)
    만사에 무정하고자하거늘(萬事欲無情)

    그는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한 사람이다. 겉으로는 냉철해도 속으로는 다정다감했다. 다만 그가 보기에 조정은 불합리와 부조리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이 그를 참을 수 없게 했다. 그는 애써 그러한 현실을 잊고자 지방을 떠돌며 술로 시름을 달랬다. 마지막 구절은 그의 애절한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송강은 특히나 술을 좋아했다. 하지만 임금으로부터 절주를 권유받았고, 훗날 계주문(戒酒文)까지 지어 절제하고자 했다. 그는 술을 즐긴 이유로 첫째 불평(不平, 심적 불평 상태), 둘째 우흥(遇興, 흥을 만남), 셋째 대객(待客, 손님 접대), 넷째 남이 권하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움(難拒人勸) 때문이라고 말했다.

    종가에는 13대손 정훈택(종회 진천지부장) 씨와 정순택(충북 영일 정씨 종친회 총무) 씨가 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16대 종손 정구성(鄭求晟, 1945년생) 씨는 평생 이곳에서 종가를 지키며 종손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선한 인상의 그는 76년 부친이 세상을 버린 이후 종손이 되어 막중한 송강 종가를 맡고 있다.

    이야기를 좀 별나게 시작했다. 일전에 안동의 퇴계 이황 선생 종가에서 100세를 바라보는 종손을 만났을 때, 조금의 착오도 없이 송강의 시를 외운 일화를 소개했다.

    신도비
    퇴계 종손은 이 시가 너무 멋있어 당시(唐詩)로 알았다고 했다. ‘追到廣陵上(추도광릉상) 仙舟已杳冥(선주이묘명) 秋風滿江思(추풍만강사) 斜日獨登亭(사일독등정)’. 흥미롭게 듣던 정훈택 씨는 흥을 내 이 시를 다시 외우면서,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축소 영인본으로 간행한 책자를 꺼내 연보(年譜) 부분을 펼쳤다. 그는 그 시와 관련된 야사를 들려줬다.

    “선조께서 공무를 보시다 조금 늦게 퇴계 선생이 떠나시는 광릉 나루로 가셨죠. 배가 강나루를 밀어낼 때쯤, 선조께서 얼른 이 시를 지어 배 쪽으로 던졌습니다. 퇴계 선생께서 펴보시고는 쥐고 있던 부채에다 차운(次韻)시를 적어서 강둑으로 던졌대요. 그런데, 퇴계 선생 문집을 만들 때 서애 정승이 그것을 빼버렸다고 해요.”

    이 시는 송강 선생의 문집과 연보에 관련 일화와 함께 실려 있다. 송강의 아들 정홍명의 문집인 <기옹집>과 <기옹만필> 등에도 소개되어 있다. <기옹만필>에는 ‘만강(滿江)’이 ‘만강(滿腔)’으로 표기되어 있다. 연보엔 송강이 이 시를 지어 전하자 퇴계는 ‘즉시 화답해 부채에 적어 주었다(先生卽和 書扇而謝之)’고 적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음 대목이다. ‘퇴계 문집 속에 정 아무개는 예전의 간신(諫臣, 굴하지 않고 바른 말을 아뢰는 신하)의 풍격이 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류성룡 정승이 유고를 편집할 때 깎아 없앴다(又退溪藁中 有記鄭某有古諫臣風云云 而柳相成龍編次遺藁時 刊去之)’고 적혀 있다. 진위 여부를 퇴계 학파의 자료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송강 측에서 보면 여간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듯하다.

    혹시 하는 마음에서 퇴계 선생의 문집이나 문집고증(류도원 찬, 1891년刊) 등 관련 도서를 살펴보았으나 시에 차운한 것이나 그 외 송강과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었다. 정황으로 보면 필시 퇴계 선생이 차운해 시를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고 서애 선생이 고의로 그렇게 행동했을 것으로 단정할 수도 없다.

    아니면 송강 문집을 편찬한 이들의 무고일까? 이 역시 알 수 없다. 답답했다. 그래서 당시 전별 장소였던 한강변 광릉 포구로 나가 그 시를 읊조려보았다. 언제 들어도 멋진 시다. 배에 오른 퇴계 선생의 탈속한 모습까지 머리 속에 그려진다. 도골선풍(道骨仙風)이다.

    종가에서 족보를 펴서 종손 계통을 적어보았다. 아들 기명(起溟, 華谷公)이 진사요, 손자는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뒤 현감을 지냈다. 증손자 대에 처음으로 양자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6대손에서 다시 양자로 대를 이었다. 10대손이 인창군(寅昌君), 11대손이 인선군(寅善君)에 봉해졌고 13대손이 진사로 남포현감을 지냈으며, 14대손이 양성군수를 역임했다. 그가 현 종손의 조부다.

    송강 종가는 영일 정씨 문청공파(文淸公派)에 속한다. 송강의 시호를 파의 명칭으로 가져다 쓴 것. 송강의 맏손자인 화곡 정운의 갈래는 달리 화곡공파라고 불리고 있다. 종가에 남은 고문서가 있는지 물었다.

    “친필 글씨 몇 점이 있지만 깊숙이 보관해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많아 일가라고 해도 신분이 불확실하면 집안에 들이지 않아요. 유물과 유품은 담양에 가면 많이 있습니다.” 세전지가(世傳之家)라면 겪는 동병상련의 안타까움이다. 더욱이 송강 종가는 퇴계 종가처럼 산중에 홀로 떨어진 외딴집이 아닌가.

    본래 종택은 사당 아래에 있었지만 성역화로 그보다 아래쪽인 현 위치에 신축했다. 쓸모를 생각했는지 대청이 드넓다. 벽쪽 서가에는 두 뭉치의 고문서 더미가 있는데, 그중에 5대손 일하(一河) 대에 작성된 양자문건인 예조입안(禮曹立案)도 들어있다.

    종손은 청주농고를 졸업한 뒤 줄곧 농사를 지었다. 논이 26마지기, 밭이 2,000 평이다. 산간이라 소출이 시원치 못해 살림은 늘 쪼들렸다고 한다. 종부 광산 김씨(金善玉, 1944년생)는 사계 김장생의 후손이다. 차종손은 고등학교를 나와 진천에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미성이다.

    종손이 기억하는 선친의 가르침은 ‘첫째 정직해라, 둘째 남에게 나쁜 일 하지마라, 셋째 제사를 잘 지내고 위패를 잘 간수해라’ 세 가지였다. 실제로 선친은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갈 때도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위패와 족보만은 꼭 가슴에 품고 다니셨다고 한다.

    잔설 때문에 미끄러운 비탈길을 내려가 송강의 신도비로 향했다. 신도비명은 우암 송시열이 찬했고 글씨는 문곡 김수항이 썼다. 신도비의 귀부(龜趺)는 자연석에 거북 모양으로 조각됐다.

    그 밑부분을 파보았다고 했는데, 1m 이상 내려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종가에서는 신도비의 귀부는 자연석에 조각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송강기념관은 고 여초거사(如初居士) 김응현(金膺顯)이 썼고, 그 맞은편에 시비가 서 있다. 시비 후면에는 송강의 대표작인 사미인곡(思美人曲) 일부가 새겨져 있다. 당초 1961년에 건립된 시비는 80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건립 주체는 한국국어교육학회와 청주국어국문학회였다.

    시비 위에는 송강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송강사(松江祠)가 있다. 묘소(지방기념물 제106호)는 종택 뒷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송강의 묘소는 손자(鄭瀁) 대인 현종6년(1665)에 경기도 고양 원당에서 옮겼는데, 우암 송시열이 그 일을 지휘했다고 한다.




    정철 1536년(중종31)-1593년(선조26)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 봉호는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송강 정철에 대한 연구는 문학이나 정치 분야에서 괄목한 성과가 있어 단행본으로도 여러 권 출간되었을 정도다. 특히 그의 가사문학은 더욱 빛을 발하며 우리 문학사에 탁월한 족적을 남겼다.

    송강은 가사문학의 거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정치적 풍운아로서 그의 행적은 그 빛에 가린 감이 없지 않다. 선조로부터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은 송강은 우의정에 오르기도 했지만 유배의 쓴맛을 보기도 했다. 반대 당인들과의 첨예한 대립으로 갈등을 부른 때문이다.

    ‘정치인 송강’만으로도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우선 몇 편의 훈민가(訓民歌)로 송강의 면모를 알아볼 수 있다.

    1580년(45세)에 지은 훈민가 16수는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재미 없는 소재다. 그러나 뜻을 음미하며 읽으면 가슴에 찡하게 와 닿는 아우라를 느낄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유용한 교훈적 내용이다.

    사당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면 이 몸이 사라시랴
    하늘갓튼 가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훈민가 첫수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다. 넷째 수도 그러하다.

    어버이 사라신 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읽은 적이 있는 감동적인 시조다. 셋째 수는 다소 생소한 내용이긴 하나 감흥은 첫 수에 못지않다.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아
    뉘 손에 태어났기에 모습조차 같타신가
    한 젖 먹고 자랐으니 딴 마음 먹지 마라.

    필자는 도자기 필통에 현대 서예작가가 예서로 쓴 이 작품에 감동을 느껴 책상에 놓아두고 감상했다.

    송강은 백성 교화에 시조들을 활용했다. 목민관으로 나가거나 유배를 당했을 때 백성 교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듯하다. 그의 바람은 사후에도 이루어졌다. 영조46년(1770) 1월에 왕명으로 민간에서 소학 및 훈민가를 외워 익히도록 여러 도에 알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오랫동안 송강의 가사는 백성의 교화에 큰몫을 했다.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교훈도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이 되는 길을 가라고 강조하며, 헛된 명예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지 말라고 당부했다.

    옛 것을 배우고 어진 이가 되려는 것으로 삶의 목표로 삼으라. (學古希賢爲己任)
    어려움을 참고 견뎌라. (耐苦忍辛)
    괴로움을 감수하고 고요함을 즐겨라. (甘苦樂寂)

    송강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평생을 독서에 힘쓴 이다. 주서절요(朱書節要, 퇴계 편찬)를 매권 70번 이상을 꼼꼼하게 읽었다고 한다. 환란에도, 유배 중에도 한결같이 독서에 힘썼다.

    을사사화에 매부인 계림군이 연루되면서 부친과 백형이 화를 입어 가계가 몰락했다. 10세 때부터 부친의 유배지를 따라 옮겨 살았고 16세 때 비로소 풀려나 조부의 묘소가 있는 담양 창평(昌平)에 터를 잡았다. 이곳에 죽록천(竹綠泉)이 있는데 송강이라는 호도 죽록천의 별칭이라 한다.

    이때 하서 김인후와 고봉 기대승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의 길로 나아갔다. 김인후는 송강의 지조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상촌 신흠이 고인을 풍도(風度)를 지닌 인물로 극찬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송강은 26세 때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했고 이듬해에 문과 별시에 역시 장원으로 급제한다. 문과 장원 급제는 어려운 만큼 대우도 특별했다. 종6품직이 주어지는데, 병과 급제자가 9품부터 시작하는 것과 비교하면 파격이다.

    의정부의 정1품인 삼정승과 종1품인 찬성, 그리고 정2품인 찬성이 모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들로 임명된 때가 있었다. 1585년(선조18년) 사암 박순이 영의정, 소재 노수신이 좌의정, 임당 정유길이 우의정, 송강 정철이 좌찬성, 청천 심수경이 좌참찬 직에 있었을 때가 그러했다.

    이때 다섯 사람들은 계축(契軸)을 만들었는데, 이름이 정부용두회축(政府龍頭會軸)이었다. 이 이야기는 차천로가 지은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라는 글에 실려 있다. 당시 송강은 49세였다.

    이듬해에는 김우옹과 정여립의 공격을 받아 체직되고, 이어 고양(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으로 물러나 지내다 창평으로 다시 옮겼다.

    이 무렵 자의반 타의반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다 대선배인 노수신을 찾아가 작별 인사를 했다. 노수신은 술을 마련, 당파를 초월해 진심으로 위로했는데 이는 그가 누구보다 실각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부채에 시를 써서 정표로 주었다. 그 뒷구는 ‘한평생 충효로 자임하는 그대가(平生任忠孝)/그걸 갖고 어디로 가시려는가(持此欲何之)?’. 충효의 포부를 저버리지 말고 재기하라는 격려다.

    후일 송강은 노수신이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몰려 죄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자 글을 올려 정지시킨다. 이에 대해 후배인 서애 류성룡(서애의 부친은 노수신과 동갑이며 벗)의 시각은 다르다.

    “기축년(선조22, 1589년)에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 (송강은) 추관(推官)이 되어 기회를 타서 자신과 당파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모함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소인이라고 지목하여 강계로 귀양 갔다. 임진년에 행재(行在, 임금의 임시 처소)에 불려갔는데, 또 상의 뜻에 거슬려 죽은 뒤 관작이 삭탈되었다”고 적고 있다.

    송강은 54세(선조22, 1589년) 때 정여립 모반 사건을 만나 11월에 우의정이 되고 이 옥사를 역옥으로 규정하며 주도적으로 다스린다. 송강은 이듬해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역옥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에 봉해짐과 아울러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의 봉호를 받는다.

    송강에 대해 실록에서도 그의 결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부족했다고 아쉬움을 적고 있다. 만약 송강이 강호와 산림에서 평생을 살았다면 곤욕을 치루지 않았음은 물론, 더욱 성취할 수 있었을 듯싶다. 일리 있는 가설이 아닐까.

    ▲ 애창되고 있는 송강의 한시

    山寺夜吟(산사야음) / 송강 정철

    蕭蕭落木聲(소소낙목성) 우수수 지는 나뭇잎 소리여
    錯認爲疎雨(창인위소우) 성긴 빗소리로 잘못 들었네
    呼僧出門看(호승출문간) 스님 불러 나가 보라 했더니
    月掛溪南樹(월괘계남수) 시내 남쪽 나무에 달 걸렸다네.

    (출전 : 송강집 권1)

    당시(唐詩)의 멋을 가장 잘 담은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은 이 시는 감식력이 남달랐던 허균조차 감탄했다고 한다. 다만 허균은 ‘호승(呼僧)’을 ‘호동(呼童)’으로 표기하고 있다.

    다음 호에는 연안 이씨(延安李氏)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종가를 싣습니다.


    입력시간 : 2007/02/28 14:06

  • HOM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