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브랜드 파워 높이고 기업 운명까지 좌우

#1. 중국 경제성장의 상징 도시인 상하이 최고급 백화점 ‘동방상창’의 가전 코너. 세련된 차림의 한 신세대 주부가 세계적 브랜드의 제품들을 둘러보다 한 매장 앞에 선다. 냉장고에 새겨진 화려한 꽃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그녀는 몇가지 기능을 알아보곤 바로 구입한다.

지난해 상하이, 베이징 등 중국 주요도시 백화점 가전매장에서 자주 목격되던 장면이다. 냉장고(LG 디오스)의 성능과 더불어 중국 부유층 여성들을 사로잡은 것은 ‘꽃의 화가’ 하상림 작가가 디자인한 ‘아트 플라워(Art Flower)’ 였다.

#2. 패션의 본고장 파리에서 한국의 스타 디자이너 이상봉 씨는 한글을 모티브로 한 패션쇼로 “모던한 동양미의 진수”라는 극찬을 받았다. 유럽과 중동의 부호들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지면서 이상봉 마니아들이 생겨났다. 지난해 모스크바 패션쇼에는 관람객 중 한글 의상을 입은 유럽인들이 다수 눈에 띄어 화제가 됐다.

산업 분야에서 아트 디자인의 가치와 힘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선진국에선 아트, 또는 디자인이 제품에 접목돼 생산성과 브랜드 파워를 높이는 것은 물론,기업의 운명까지 좌우한지 오래다.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명품인 루이뷔통의 경우 90년대 중반까지 여행용 가방 정도가 명품으로 인정 받았지만 세계적인 패션상 CFDA를 7회나 수상한 천재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하면서 고전적 이미지를 벗어나 고급 패션 브랜드로 확실히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다.

■ 삼성 휴대폰·LG가전 세계적 성공

한글 디자인으로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한 디자이너 이상봉, 삼성 2007년형 보르도 LCDTV.

맥킨토시로 유명한 미국의 애플은 97년까지 IBM 컴퓨터(PC)에 밀려 고사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수석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의 파격적인 디자인 제품인 ‘아이맥’으로 기사회생했다.

나아가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기업들의 사업은 고유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샤넬의 레스토랑, 루이뷔통의 박물관, 페라가모의 호텔, 베르사체의 항공기 인테리어 등등.

디자인이 21세기 경영코드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한국에서도 몇 해 전부터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까지 디자인의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삼성그룹은 2005년 4월 이건희 전 회장이 제품의 디자인과 브랜드를 강조한 ‘밀라노 선언’이후 디자인이 기업 경영의 핵심 요소가 됐다.

와인 잔 이미지를 형상화한 ‘파브 보르도 TV’, 삼성 디자인스쿨(SADI) 작품인 휴대폰 ‘T-100(이건희폰)’가 대박을 터트린 최대 요인은 독특한 디자인이다. 삼성전자는 2년 전부터 김치냉장고와 드럼세탁기, 에어컨 등에 국내 앙드레 김의 디자인을 적용한데 이어 세계적 디자이너 베르사체와 손잡고 프리미엄 패션 휴대전화를 선보였다.

LG전자는 2006년 12월 최신형 휴대전화 '샤인'에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의 작품을 새겨 넣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데 이어 최근엔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로베르토 카발리아가 디자인한 휴대전화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제 제품에 아트를 적용하고 디자인하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세다. 그에 따라 제품의 생산성은 물론, 기업의 존망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업이 아트 마케팅, 디자인 혁명에 나선 이유는 무얼까.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는 기업이 브랜드를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 사업을 다양화 하려는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소비자의 가치 변화를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꼽는다.

일부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었던 사치를 평범한 중하류층도 열망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명품 구입 요구가 증대하게 되고 그에 따라 아트 마케팅과 디자인이 강조됐다는 것.

삼성경제연구소 마케팅전략실 백창석 연구원도 소비자의 눈높이 변화가 생산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정보 공유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선진국의 패션과 명품 소비 트렌드를 추종하는 ‘동조화(同調化)’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은 세계 조류에 발빠른 대응을 하고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 중에는 삼성 휴대폰, LG 가전 제품, 레인콤의 아이리버 등 고유 브랜드를 갖고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세계 유수 기업들과 비교해 국내 아트 마케팅이나 디자인 수준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것은 부인하기 어렵고 보완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우선 제품과 디자이너 브랜드의 결합에 있어 지나치게 디자이너의 후광에 기대거나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하는데 그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외국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적용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김난도 교수는 “자사 제품의 기능적ㆍ미적 취향과, 연계하는 디자이너의 철학적 지향점이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소비자 인식의 관점에서 꼼꼼히 따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경현 성균관대 디자인대학원장은 “기업의 입장에선 자기 브랜드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며 “단기적인 실적에 급급해 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자체 명품을 브랜드화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업과 디자이너의 상관관계 변화도 요구된다. 삼성경제연구소 백창석 연구원은 국내 아트 마케팅과 디자인 수준을 업그레이드 하려면 두가지 전제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선 기업이 제품 디자이너의 의사결정에 간여하는 관행을 깨야한다는 것. 디자이너의 창조성을 최대한 존중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둘째, 기업 자체 디자이너를 브랜드화 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조직 안의 디자이너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기업·작가 창조적 공존이 중요

LG전자 디자인 센터, 삼성전자 디자인 경영센터.

국내 아트 마케팅 전략과 디자인 자체의 문제점도 거론된다. 이경현 성대 디자인대학원장은 국내 기업들의 디자인이 선진국과 비교해 과도하게 ‘디자인’되었다고 지적한다. “디자인을 하지 않는 것도 디자인이다. 미국 애플사의 디자인처럼 절제된 디자인이 더 효적인 경우가 있다.”

국내 여러 기업의 제품을 디자인하는데 참여하고 있는 이상봉 디자이너는 성공의 요인에 대해 “기업이 내 디자인을 최대한 존중해 주고 나 또한 (디자인에)기업의 철학과 실용성을 담으려 했다”며 “기업과 디자아너 간의 신뢰,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업과 작가, 디자이너 사이의 창조적 공존이 아트 마케팅과 디자인 혁명을 가능케 하는 든든한 기반임 셈이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