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도자기·인테리어 등 줄줄이 히트… 향수병 디자인 하고파

국내 기업의 아트 마케팅은 유명 화가의 작품이나 디자이너와의 공동 작업이 많다. 국내 패션 디자이너 중 기업의 산업디자인에 공동 참여하는 인물은 앞서 사례로 든 앙드레 김과 이상봉 정도다. 이들은 대중적인 친밀도를 지니면서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뚜렷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앞서 사례로 든 휴대폰, 도자기, 인테리어 등 산업 디자인에 참여하고 있는 디자이너 이상봉 씨를 만났다.

지난 25일 역삼동 디자인 사무실에서 그는 “이미 1996년 신세계백화점과 손잡고 이상봉 아트 컬렉션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주장한 것이 ‘라이프 스타일 디자인’이었다. 스포츠웨어부터 가구 그릇까지 망라한 것이었는데 그땐 딱 1년 만에 접었다. 시기상조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 디자인의 관건은 아름다운과 기능성

- 96년 당시 제품 디자인 컨셉트는 무엇이었나

“디자이너와 모든 것을 호흡할 수 있도록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스토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나만의 커피 잔에 내가 좋아하는 향의 커피를 마시고, 내 취향의 음악이 선곡된 음반을 듣는 것. 이런 스타일을 디자인하고 싶었다. 지금 세계 패션계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아르마니나 칼 라거펠트가 선곡한 CD가 나왔고 나도 구입했다.”

- 휴대폰부터 인테리어까지 다양한 산업 디자인을 시도했다. 의상 디자인과 산업디자인의 차이는 뭔가

“분명히 다르다. 산업 디자인은 소비자가 이용하는 것이지만, 피부와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나 패션이란 개념이 지금은 굉장히 광범위해 졌다. 주택, 자동차, 전자 기기까지 모든 것이 패션이란 이름으로 수용된다. 패션 디자이너는 가장 트렌드에 민감하다. 사회 변화에 민감한 일을 하는 사람이 패션 디자이너이니까 산업 디자인에도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 고가의 의상과 달리, 대기업의 산업 디자인은 다양한 계층이 있고, 대중의 교감을 이끌어야 하는데 어떤 부분을 고려하나

“디자인에서 아름다운과 기능성이 조화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둘 중 하나만 갖는 디자인도 의미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한테 파는지에 따라서 디자인은 달라야 한다. 예를 들어 불편하지만 미적 감각이 뛰어난 제품은 고가 정책으로 한정 수량이 아주 비싸게 팔린다. 그러나 남들과 2% 다른 이런 제품이 사회에 영향을 준다. 기업에서 디자인을 의뢰하는 경우, 현재까지는 특별한 사람을 위해 디자인 해달라는 경우가 많다. 에디션 넘버가 붙은 한정판 제품이 많다.”

- 산업디자인은 제품을 통해 기업 철학을 담아야 할텐데

- 우선 시장 조사를 한다. 반면 출시하는 제품이 아주 소량일 경우 리서치 할 필요는 없다. 기업이 추구하는 방향과 특별함만 표현하면 된다. 기업이 최근 만드는 제품의 특징을 내가 어떻게 담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예를 들어 행남자기 작업은 그 쪽에서 S라인을 모토로 했었고, 나도 S라인을 담으려고 했다. 시장 조사와 기업의 특징을 보고 그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제시해야 한다.“

-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나

“기업이 거의 나한테 일임한다. 시장 조사 후 기업과 공동으로 컨셉트를 정하고 이상봉 디자인 팀이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시안을 만들어 최종적으로 적게는 3개, 많게는 8개의 디자인을 기업에 제시한다. 기업은 현실적으로 생산이 가능한지를 조율한다. 이 과정에서 디자인이 일부 수정될 때도 있다.”

- 왜 기업이 이상봉 디자이너에게 제품을 의뢰한다고 보는가

“감성이라고 본다. 패션 디자이너의 가장 큰 장점은 상상력이다. 만화가나 소설가도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디자이너는 상상력을 현실과 결합시킨다. 일반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감성을 느끼고 남보다 앞선 생각을 하는데 전문가다. 그리고 패션과 산업 디자인은 다른 분야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바깥에서 열린 시야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바둑이나 장기도 훈수 둘 때 판을 더 잘 보지 않나.”

■ '한글' 이어 '태극기' 디자인 작업

- 반응이 좋았던 산업디자인 있나

“수치는 기업 측에 물어보는 게 더 정확할 거다. 내가 체감하는 부분은 담배 ‘에쎄’ 한정판 디자인. 아는 분이 홍콩에 유명한 영화감독에게 에쎄를 10갑 선물했고 그 감독은 여배우들에게 줬다고 한다. 여배우들 반응이 너무 좋아서 2만원씩 줄테니 100갑 사달라고 신청했다고 하더라. 프랭클린 플래너는 미국 본사 부사장이 그날로 플래너를 바꿨고 일본 지사에 가서 그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행남자기의 에스프레소 잔 디자인은 외국인을 겨냥한거다. 이것도 반응이 좋았다. 문화상품은 적은 양이라도 해외를 겨냥해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가치는 어마어마한 파장이 될 수 있다.”

- 기업에서 제안 왔던 아이템 중 거절했던 사례 있나

“디자인 적인 측면에서 어떤 평가가 나오든 나와 소비자가 즐기면서 감성을 공감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제안을 수락하지는 않는다. 우선 여름과 겨울 해외 컬렉션을 준비할 때 일정이 겹치면 거절할 수 밖에 없다. 또한 한글 디자인의 경우 많이 찍어내 가치를 낮추고 싶지 않다. 몇 개 제안이 왔던 아이템 중에 한글 아이템을 주문한 경우 거절하기도 했다.”

- 현재 A1 선수들의 유니폼과 자동차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데

“내가 했던 디자인은 언제나 한국적인 것이었다. 이제 ‘태극기를 디자인에 접목시켜 볼까?’했는데 A1에서 연락이 왔다. 기분 좋게 승낙을 했고, 국기를 산업화한다면 옷에는 어떻게 반영하고 차에는 어떻게 할건가 고민하고 있다. 자동차에 태극기와 나의 감성을 함께 담아 내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연구해 볼 생각이다. 보람 있는 일인 것 같다.”

- 앞으로 해 보고 싶은 산업 디자인 있나

“끊임없이 기회가 오면 하고 싶다. 앞서 작업했던 아이템들도 다시 기회가 오면 다른 디자인이 나올거다. 최종적인 아이템은 향수병이다. 외출할 때 마무리로 항상 향수를 뿌리지 않나. 패션의 완성이다. 디자이너들이 많이 도전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