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문화선도… 1995년 '에스콰이어' 창간 시작 'GQ' '아레나'등 남성잡지 춘추전국시대

# 어떻게 하면 한국 남자의 감각을 업그레이드하여 그 편협한 시각을 바꿔줄 수 있을까? 그 역할을 감당해줄 수 있는 것은 역시 <에스콰이어>다. … <에스콰이어>가 소개한 슈트 입기의 규칙들은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여직원들에게도 가끔 칭찬을 받을 정도가 됐다.

- <에스콰이어> 애독자 메일 중

# 동생 책상 위에서 를 보곤 했다. 처음엔 혈기 왕성한 남자들이 보는 <플레이보이>같은 잡지인줄 알았다. 어느 날 호기심에 를 들고 내 방으로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무식에 놀랐다. 내용이 알찼다. 어릴 때 좋아하던 ‘종합과자선물세트’같았다.

- 애독자 메일 중

국내 미디어환경에서 남성지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여성의 영역으로 치부된 패션문화 월간지 시장에서 20~30대 남성이 새로운 ‘틈새시장’으로 떠오르며 블루오션이 된 것이다. 1995년 <에스콰이어> 창간으로 시작해 2001년 , 2006년 <아레나>와 <맨즈헬스>, 2007년 <루엘> 등 남성지 시장은 춘추전국 시대를 맞았다. 이들 매체의 발행부수는 대략 3만에서 3만 5,000부 내외다(도표참조). 광고수요도 덩달아 늘어나 명품 의류는 물론, 자동차와 IT기기, 리조트와 골프, 담배 등 남성의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광고가 쏟아진다.

한 남성지 편집장은 “2000년대 초반 국내 잡지시장이 호황을 이루었고 ‘메트로섹슈얼’이란 새로운 스타일의 남자가 나타난 것도 남성지 시장을 넓히는 데 한 몫 했다”고 분석했다.

■ 새로운 남자, 블랙칼라워커

눈 여겨 볼 것은 이들 남성지의 애독자가 최신 문화를 선도하는 ‘트렌드 세터(trend setter)’라는 점이다. 남성지가 타깃으로 삼고 있는 ‘독자상’을 살펴보자. <아레나>의 타깃 독자는 ‘블랙 칼라 워커(Black Collar Workers)’다. 유럽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꿈꾸는 전문직 종사자를 지칭하는 말로 영국 아레나 창간 때 만들어진 신조어다.

화이트칼라로 불리던 이전 엘리트세대 보다 지적이며, 창의적인 일을 주도하는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를 일컫는다. 무엇보다 패션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남자다. 한국에서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꿈꾸는 전문직 종사자’로 구체적인 타깃을 삼았다.

다른 매체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에스콰이어>의 타깃 독자는 ‘스마트한 남자’이며 의 타깃 독자는 ‘25세에서 35세, 도시에 거주하는 자기 스타일에 대한 욕구가 있는 남자’다. 이들의 이상적인 독자상은 한마디로 TV드라마 주인공 감이다. 정말, 지향하는 독자와 실제 독자의 특성이 동일한 걸까?

한국리서치가 최근 10년 간 독자들의 기사 열독 형태 변화를 분석한 미디어 인덱스 2007년 자료를 보면, 국내 남성 월간지 독자의 대부분은 20~30대가 98%를 차지한다.

직업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학생 등 다양하다. 생각보다 졸업 학력이 높거나 소득이 높은 건 아니다. 남성월간지의 한 편집장은 “남성지 독자 중 20대 대부분이 대학생과 군인 등 경제 인구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며 “이들의 사회계층이 낮은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시사경제 주간지와 남성월간지 독자의 취향을 비교해 보면, 남성지 독자들은 스포츠와 대중문화, 컴퓨터와 레저, 여행 등 소프트한 콘텐츠를 주로 소비한다. 즐겨보는 TV 프로그램도 뉴스와 시사보다는 코미디와 토크쇼, 버리아어티 쇼와 같은 프로그램이다. 소득을 제외하고 타깃 독자와 실제 구독자의 특징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무엇보다 문화에 대한 욕구가 강한 부류임이 분명하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남성지를 구독했다는 대학생 이성엽(23) 씨는 “386세대가 일간지를 통해 정치, 사회를 보는 눈을 키웠다면 우린 잡지를 통해 문화와 패션을 배운다. 세대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2000년부터 남성지를 보기 시작했다는 직장인 김승석(30) 씨는 새로 나온 IT기계를 사거나 인터넷으로 외국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을 사는 것이 취미다. 그는 “예전에는 문화 잡지도 몇 개씩 봤지만 이제는 남성지 하나만 본다. 뮤지컬 정보나 음반 리뷰 등 정보를 얻는데 좋다”고 말했다.

이런 남성지를 보면 ‘트렌디’해 지는 걸까? <루엘>의 문일완 편집장은 “매거진을 보는 사람들이 유행을 앞서가는 것은 100%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트렌디 한 남자가 잡지는 보는 거고, 또 트렌디 해지려고 보는 것이다”고 말했다.

남성지를 3년 이상 구독해온 20, 30대 남성들을 심층 인터뷰 한 결과도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생 황인섭(23) 씨는 “그루밍족(grooming, 화장하는 남성)이란 말을 잡지에서 처음 읽었다. 이후로 스킨을 화장솜에 적셔 바른다. 미드를 보게 됐고, 브런치를 즐긴다거나 스타일에 관한 기준을 세우는 것도 잡지를 통해서였다”고 말했다.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이선후 (28) 씨는 “처음에는 패션브랜드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게 됐다. 나중에는 비평과 칼럼이 마음에 들었다. 색다른 음식점이나 음악계 소식을 듣는 다거나 국내 잘 나가는 비평 필진 정보를 얻는 것도 남성지다”고 말했다. 이성엽 씨는 “2년에서 3년 꾸준히 구독하면 문화와 패션에 대한 감각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 30, 40대로 이어지는 메트로섹슈얼의 물결

남성지의 기사 콘텐츠는 ‘성공한 남성’의 라이프스타일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이들이 먹고 마시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기사의 아이템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놀이 문화가 기사의 아이템이 된다. 콘텐츠는 남성의 패션에서 음악, 공연, 자동차, 컴퓨터, 성문화까지 다양하다.

남성지가 읽을 것이 없는 잡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흔히 ‘포르노 종이’로 알려진 남성지의 대명사, <플레이보이>는 여성들의 섹시한 화보와 함께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의 단편 소설을 싣는가 하면, 인권운동가 말콤엑스와 존레논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이안 플레밍의 ‘제임스 본스’ 시리즈와 철학자 롤랑바르트의 글이 함께 실린 것도 남성지다.

국내 남성지 역시 마찬가지다. 패션과 성에 관한 시시콜콜한 내용과 함께 가정의 소중함과 같은 연성뉴스, 촛불집회, 한미 쇠고기협상과 같은 경성 뉴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콘텐츠를 다룬다. 홍세화, 김규항 등 당대 쟁쟁한 비평가의 글이 명품 화보와 한 권에 실린다. 남성지는 남자들의 관심사를 끊임없이 상업성과 연관시키며 성장하는 셈이다. 최신의 놀이문화와 소비코드가 소개되고, 구독자들은 잡지를 통해 ‘트렌드세터’가 된다.

남성지 <루엘>의 문일완 편집장은 “사실 모든 트렌드는 기업의 브랜드에서 만들어 진다. 예를 들어 ‘미드’의 영향으로 브런치가 소개되고 강남과 분당의 식당들이 브런치 메뉴를 내놓으면서 브런치 문화가 시작됐다. 브런치 메뉴를 내놓은 가게가 없었다면 사먹을 사람도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1995년 <에스콰이어> 창간과 더불어 시작된 국내 남성지 시장은 올해로 13년째를 맞고 있다. 더불어 대학생 시절 남성지를 보기 시작한 독자들이 30~40대 사회인이 됐다. 한국판 메트로섹슈얼 계층이 30,40대까지 넓어진 셈이다. 이들을 타깃으로 한 문화패션 남성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창간한 <루엘>은 ‘평균나이 37세, 대기업 부장 이상의 성공한 남성’을 타깃으로 만든 남성지다. 이 잡지는 창간 전에 백화점, 카드회사 등의 VIP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2만 5,000부 정기구독을 확보한 채 시작했다. 30,40대 남성지 독자들은 젊은 세대와 달리 유행 문화와 신규 아이템을 혼자 보고 즐기는 것이 특징이다.

문일완 편집장은 “구체적인 숫자로 말할 수 없지만 국내에는 별별 부자가 다 있다. 취미로 요트를 타거나 MTB 자전거를 몇 백대 씩 모으고, 주말에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은 대부분 30,40대 대기업의 임원, 전문직 남자다. 이들이 주된 독자이자 트렌드세터이지만, 흔히 30,40대는 직장에서 라이프스타일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