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도 경쟁력 강요받는 남자들에 최신 정보와 대안을 제시

가끔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자칭 ‘열혈 독자’들을 만난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청년부터 새치가 드문드문 눈에 띄기 시작하는 40,50대 중년에 이르기까지.

복학생부터 청년 CEO, 회사원, 드물게는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그들과의 만남은 대개 “책 잘 보고 있습니다” 식의 칭찬 조로 시작되지만 끝은 언제나 ‘안일하게 일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귀결된다. 그들은 늘 내가 ‘독자’라는 존재에 대해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새로운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 가히 ‘대한민국의 멋쟁이 남자들’이라 불러도 좋을 패션지 구독자들은 시장에서 산 1만 원짜리 티셔츠와 발렌시아가 모직 팬츠를 시크하게 매치할 줄 알고, 왜 어떤 운동화는 1만원이지만 똑같이 손바닥만큼의 헝겊 조각과 엄지 손가락 분량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다른 어떤 운동화는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지를 이해한다.

그들은 미용실 문을 당당하게 열고 들어가 “그냥 단정하게 깎아 주세요”가 아니라 “뒷머리는 요렇게, 앞머리는 이렇게…”라고 말할 줄 알고, 자신의 첫인상을 좋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면 여성들로 가득한 네일 케어 숍을 찾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잡지를 활용할 줄 아는 남자들이다. 이 남자들은 패션 잡지에서 자신이 살 물건이나 좋아하는 브랜드와 관련한 새 소식을 얻고, 자기가 이미 갖고 있는 패션 아이템의 새로운 활용팁을 얻는다. 한편, 잡지를 만드는 사람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들은 친구들이다. 어떤 식으로든 옷과 스타일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동반자인 동시에 ‘열심히 하지 않으면 비웃음을 사게 될 지도 몰라’ 늘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드는 감시자들이다.

■ 대한민국 평범한 아저씨를 위하여

그러나 그런 남자들은 1퍼센트가 될까 말까, 세상엔 패션 잡지를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로 여기고 살아가는 남자들이 훨씬 더 많다.

가령 우리 오빠 같은 사람. 두 딸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인 우리 오빠는 결혼할 때 산 아파트 융자금 이자를 갚느라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가는, 지극히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30대 가장이다. 홈쇼핑에서 3만 9900원을 내면 3장을 주는 바지를 사고선 싸게 샀다고 좋아하고, ‘창고대방출’ 플래카드가 커다랗게 걸려 있는 행사장에서 5만원 짜리 수트를 ‘건졌다고’ 자랑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아저씨’.

각자 성인이 되어 다른 집에 살게 된 이후로 이제 한 달에 한 번도 보기 힘든 사이가 됐지만(그 만남조차 오빠의 옷차림에 대한 나의 불만 표출로 시작되어, “다음부턴 제발 그렇게 입지 마” 식의 당부로 끝맺기 일쑤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우리 오빠를 위해 잡지를 만든다.

뭐 그리 대단한 우애로 똘똘 뭉친 남매라고, 자나깨나 오빠를 생각하면서 잡지를 만든다는 게 아니라 우리 오빠 같은 남자들을 생각하면서 잡지를 만든다는 뜻이다. 우리 오빠야 말로 패션 잡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남자이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남자의 전형이니까.

지금은 패션 잡지들뿐 아니라 광고, 신문, TV 뉴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디어들이 ‘남자도 옷을 잘 입어야 한다’고 외쳐대는 시대다. 옷을 잘 입는 남자가 일도 더 잘하고, 옷을 못 입는 남자는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해 옷을 잘 입는 남자보다 거래를 성사시킬 확률이 낮다고 그들은 자세한 수치까지 거론하며 외쳐댄다.

나는 그 외침의 근원지에서 가장 큰 소리로 그렇게 떠들어댄 사람이지만, 가끔씩은 뒤통수가 따갑다. 세상엔 반들반들 광채가 날 정도로 멋을 내고 다니는 남자들보다 그럴 시간과 마음과 경제적 여유가 없는 남자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아는 탓이다.

나는 남자들의 삶이 완벽한 옷차림에 대한 지식까지 마스터하고 살기엔 너무나 고달픔을 안다. 상사의 눈치를 보고, 아내의 눈치를 보고, 부족한 외국어 실력을 보충하고, 오고 가고 도합 2시간이나 걸리는 출퇴근 시간으로도 빼곡히 차는 그들의 24시간 속에 ‘어떻게 옷을 입을까?’ 고민하고 이 옷 저 옷 입어보면서 옷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시간이 팔고들 틈이 없음을 안다.

나는 그런 남자들을 피곤하게 만든 주범 중 한 명으로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기사를 쓴다. 그들이 내가 쓴 패션 기사에서 자신들을 멋지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덜 촌스럽게 만들어줄 정보를 얻어가기를 바라면서.

수트를 어떻게 고를 것인가, 어떤 구두를 사야 오래 신을 수 있을 것인가, 구두를 어떻게 닦을 것인가, 수트의 바지 길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 하는 등의 기본적인 정보들을 통해 반들반들 윤이 나는 스타일은 아니더라도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은 초라함만은 떨쳐내기를 기대하면서.

■ 잡지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사다리

가끔 어떤 남자들은 항의해온다.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현실 속의 남자들을 배려한다면 왜 그토록 값비싼 명품들만 싣느냐?”고 따져 묻는다. 그러나 패션 잡지가 명품으로 도배되는 것은 ‘최고의 것만을 보여준다’는 패션 잡지의 존재론적 의무감 때문이지 명품 브랜드에서 내놓은 수트만이 좋은 수트임을 강요하고자 함은 아니다.

우리는 비싼 구두가 좋은 구두라고 힘주어 말하지만 만약 독자가 최고를 가질 형편이 아니라면 그 다음으로 좋은 것,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그 다음 좋은 것을 선택하면 될 것이다.

패션 잡지는 현실과 이상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사다리다. 누군가는 사다리의 제 아래칸에 있을 테고, 누군가는 이상 세계와 가장 가까운 맨 윗 칸에 서 있겠지만 그 위치가 어디든 사다리 위에서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그들은 모두 이상 세계를 꿈꾸고, 그곳에 닿으려 하지만 아직은 그곳에 닿지 못했으며, 노력 여하에 따라 그곳에 닿을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하철 입구 노점에서 산 넥타이로 일주일을 나지만 한때 우리 오빠는 <영웅본색>의 주윤발 패션을 흠모한 나머지 엄마의 롱코트를 훔쳐 입고 가출을 감행했던 ‘열혈 스타일 보이’였다.

난 우리 오빠 같은 남자들, 세상 살이에 지치고, 일도 잘 하고, 좋은 가장이 되고, 옷가지 잘 입어야 한다고 강요 받는 이 땅의 남자들이 패션 잡지를 통해 정보와 위안을 함께 얻기를 바란다.

그들이 우리가 만들어놓은 가상의 세계를 보면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스타일 팁을 얻는 한편으로 ‘더 풍요로운 삶’을 구경하고, 꿈을 키우고, 언젠가 자신도 그런 세상에 닿을 수 있음을 되새겼으면 좋겠다.

나와 내 동료들은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이 우리가 만든 책을 펼치고, 우리가 쓴 기사의 첫 줄을 읽기 시작하는 그 순간을. 그 짧은 순간에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당신의 멋에 대한 본능이 깨어나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만든 가상의 세계를 보면서 당신의 지친 삶이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는다면, 그리고 당신의 그 어중간한 넥타이 컬러가 조금이나마 산뜻한 것으로 바뀔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우린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심정희 <에스콰이어> 패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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