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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유행을 걷는 남자들] '신사의 오락'을 위한 문화 충전소
이미지 고급화로 고정관념 탈피… 각종 유행 재빠르게 전달









한국 사회에서 ‘남성 잡지’라는 용어가 지금보다 한결 협소한 뉘앙스 안에 갇혀 지내던 때가 있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성지라 하면 복장 불량 여성 도감 정도겠거니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이런 선입견은 <에스콰이어>나 <지큐>같은 해외 남성지의 한국판이 창간되면서 어느 정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 잡지들이 대중의 고정 관념을 뒤엎기 위해 택한 노선은 내용의 고급화였다. ‘신사의 오락’을 지향했던 이들 매체의 창간 이후, 한국 남자들은 비로소 ‘공공장소에서도’ 떳떳이 볼 수 있는 잡지를 얻게 된 셈이다.

■ 완벽한 남자들의 오락



남성지들을 패션 잡지로 이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차라리 라이프 스타일 잡지란 분류에 더 잘 들어 맞는다. 문화나 시사 이슈를 다루는 피처(feature) 기사가 패션 기사 이상의 비중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잡지들이 대외적으로 겨냥하는 독자층은 대충 이렇다.

1. 스스로를 애써 가꿀 줄 알고, 2. 값있게 소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3. 섹스도 화끈하게 즐기는 데다, 4. 예술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고른 관심을 보이는 창의적이고 세련된 남성들. 즉,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 없이 근사하고 이상적인 존재 말이다.

날렵한 패션 감각은 이 남자의 수많은 미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유행을 포착해내는 예민한 식견과 문화적 소양 또한 그에게는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매달 차곡차곡 발행되는 남성지들은 각 편집부 나름의 기준에 의해 선별된 이상적 취향의 총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잡지는 과연 이토록 근사한 소수의 남자들만을 위한 매체일까? 설마 그럴 리가. 근사한 소수와 근사해지고 싶은 다수, 남성지들이 공략하고자 하는 실 독자층은 이 모두의 공집합이다.

패션 기사에서 몸단장의 지침을 얻는다면, 피처 기사에서는 대화에 활용할 재료들을 챙길 수 있다. 잡지의 피처 기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문화적 흐름을 종합적이고 신속하게 파악하도록 돕는다. 만약 당신이 깊이 있고 전문적인 미술 기사나 문학 비평을 원한다면, 응당 미술 전문지나 문예지를 구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 두루 회자되는 블루칩 작가가 누구인지, 들춰 볼 만한 새 소설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면 남성지 쪽이 오히려 더 유용할 수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대중 잡지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것을 경계한다.

이를 한계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 만도 않다. 미술 전문지나 문예지를 이질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은 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 잡지는 예술 전문지와 대중 사이의 골 깊은 계곡에 편리한 다리가 되어줄 수 있다.

게다가 이들 매체는 저명한 미술 작가와 섹시한 댄스 가수를 차별하지도 않는다. 즉, 고령의 몸으로 구도하듯 작품을 만드는 루이스 부르주아와 ‘신상녀’ 서인영의 인터뷰를 한 권의 책 안에서 모두 만나는 것도 가능하단 뜻이겠다. 남성지의 넓은 오지랖은 다양한 화제와 독자들을 효과적으로 중매한다.

모든 미디어는 새로운 내용을 발 빠르게 소개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그건 남성 잡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사 전문지가 사회의 첨예한 이슈를 신속하게 보도하려는 쪽이라면, 대중잡지는 다양한 장르의 유행, 그리고 문화계를 조망하는 참신한 시각을 좇는 쪽이다. 대중의 기호나 놀이 문화와 같은 몇몇 분야에 있어, 잡지는 모종의 경향을 매우 재빠르게 포착해낸다. 새롭고 흥미로운 인물을 찾아내는 데도 늘 촉각을 곤두세우는 편이다.

■ 신사동 가로수 길의 도약





잡지가 지목한 대상이나 현상을, 신문 혹은 TV가 뒤따라 주목하고 전파해 보다 규모 있는 문화적 현상으로 만드는 경우는 가끔 목격된다. 쉽게 떠오르는 예가 바로 신사동 가로수길의 도약이다. 사실 잡지들이 이 지역을 화제로 떠올렸던 건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홍대 앞이나 청담동, 혹은 삼청동처럼 분주하지도 않으면서 제법 운치가 있었던 가로수길은 이른바 ‘트렌드세터’들의 아지트로 일찌감치 지목된 바 있다.

이제 이 좁다란 길목은 서울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매달 새로운 카페와 음식점, 상점들이 들어서고 있으며 일간지의 주말판과 케이블 TV의 쇼 프로그램들은 이 거리의 풍경을 앞다투어 소개하는 중이다. 가로수길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잡지들은 차라리 좀더 한적하고, 그래서 발견의 재미가 있는 서울의 다른 지역(예를 들면 부암동이나 효자동, 연희동 같은)들로 시선을 옮기고 있다. 그건 늘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일 수도 있고, 남들 다 아는 일에는 흥미를 잃어버리는 매체 특유의 괴팍함 때문일 수도 있다.

잡지와 관련된 문화 현상 중 요즘 가장 눈에 띄는 건 사실 따로 있다. 바로 ‘잡지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 그 자체다. 잡지 지면 위에서 이름을 알린 소위 ‘패션 피플’들은 이제 신문이나 TV에도 빈번하게 모습을 비치고 있다.

아예 ‘TV로 보는 잡지’를 표방한 프로그램들이 케이블 채널에서 전파를 타는 중이며, 패션지 기자의 일상을 다룬 소설 <스타일> - 작가 백영옥은 한때 잡지사에서 일한 이력을 지녔다 - 은 상반기에 크게 주목 받은 베스트셀러였다. ‘잡지 친화적 인간’의 라이프 스타일이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소비되기에 이른 것이다. 패션의 위상 변화와는 다소 구분 지어 생각할 만한 내용이다.

이제는 결코 적지 않은 수의 남자들이 잡지를 읽는다. 좋아하는 이들도 많지만, 비난하는 사람들의 규모는 그 이상이다. 후자에 속하는 몇몇은 종종 이런 대사를 읊기도 한다.

“잡지 같은 거, 읽을 만한 내용이 없잖아. 그래서 난 안 봐.” 대상에 대해 잘 알아야 욕도 더 매섭고 푸지게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일단은, 언제부턴가 너도 나도 입에 올리고 있는 남성지라는 걸 한번 일독해 보시길. 읽고 났더니 과연 영 후진 것 같다면, 그때 가서 집어 던져도 늦지 않다.

정준화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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