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메세나 운동 본격 성장기 돌입… 동참 기업 증가세 뚜렷일회성 단순 후원에서 사회공헌 활동, 문화마케팅으로 진화

기원 전후 고대 로마제국의 재상이었던 마에케나스는 이름 높은 문화예술 후원자였다. 그는 당대의 ‘시성’ 베르길리우스를 비롯해 다수의 예술가들이 마음 놓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로마의 예술가들에게 마에케나스는 수호천사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그의 이름은 20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에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두터운 보호와 지원’을 의미하는 메세나(Mecenat)라는 보통명사로 부활했다. 이후 메세나는 세계 각국에서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 활동’을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메세나는 이제 국내에서도 서서히 꽃을 피우고 있다. 1960~70년대부터 일찌감치 메세나 관련기구가 만들어진 서구사회와 달리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 비로소 메세나라는 개념이 도입됐다. 기점은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현 한국메세나협의회)가 설립된 1994년이었다.

물론 메세나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지만 이전에도 사실상의 메세나 활동은 있었다. 일부 재벌그룹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문화재단을 통해 각종 문화예술 지원 사업을 벌인 것이 그런 사례다. 하지만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메세나의 개화기는 1990년대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국내에 메세나가 정착하는 데는 몇몇 기업인들의 선구적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한국메세나협의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고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은 ‘한국의 마에케나스’로 불렸을 만큼 문화예술에 대한 전폭적인 후원자로 유명했다.

그는 무명의 신진 화가들에게 중앙화단 진출 기회를 주는가 하면, 유망한 음악 영재들에게 명품악기를 무상 대여하는 등 실질적 지원책으로 미래를 열어줬다. 특히 로린 마젤, 쥬빈 메타 등 세계적 지휘자들과의 친분을 통해 음악 영재들이 세계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줬다. 그 덕에 바이올린의 이유라, 피아노의 손열음 등이 차세대 월드스타로 부상하는 성과를 낳았다.

고 박 회장과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문화예술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매우 크다. 그런 까닭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을 후원하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메디치 가문에 빗대 금호아시아나그룹을 ‘한국의 메디치가(家)’로 일컫기도 한다.

2005년 박 회장의 타계로 문화예술계는 ‘든든한 빽이자 큰 그늘’(연극배우 손숙의 표현)을 잃어버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실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2, 제3의 마에케나스가 어느덧 주변에 다가와 손길을 건넸기 때문이다. 이는 2000년대 이후 국내 메세나가 본격적인 성장기에 진입해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기업의 저변이 두터워졌기에 가능했다.

한국메세나협의회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문화예술 후원금액 규모는 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 지난 2006년에는 약 1,840억 원에 달했다. 한국메세나협의회 회원기업의 숫자도 2007년 현재 180개를 웃돌고 있으며, 신규 가입을 원하는 기업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

■ 최근 3년 중공업 대기업 '메세나대상' 눈길

우림건설 진해 ‘우림필유’ 입주 문화행사(맨위)
포스코가 후원하는 포항불꽃축제(가운데)
르노삼성자동차가 후원하는 한국가요제 수상자들(맨아래)
우림건설 진해 '우림필유' 입주 문화행사(맨위)
포스코가 후원하는 포항불꽃축제(가운데)
르노삼성자동차가 후원하는 한국가요제 수상자들(맨아래)

국내 기업들의 메세나는 주로 사회공헌 활동을 통한 기업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많이 이뤄진다. 전 세계적으로 기업의 사회적책임(CSRㆍ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핵심 경영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그 실행 수단 가운데 하나로 메세나를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무래도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이 메세나 활동에 적극적이다. 메세나도 자금 여력이 따라줘야만 실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메세나협의회가 1999년부터 주관하고 있는 ‘메세나대상’의 역대 수상기업을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흐름이 감지된다. 제1회부터 5회까지는 주로 재벌그룹 소속 문화재단이 대상을 수상했던 데 비해, 2005년 제6회부터 지난해 7회까지는 포스코, 한화석유화학, 현대중공업 등 ‘중후장대 업종’의 대기업이 잇달아 대상의 영예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화와는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중공업 기업들이 메세나 운동의 선봉장으로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는 분석이다. 우선 문화예술의 향기로 딱딱하고 차가운 기업 이미지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바꿔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잘 나가는 기업’으로서 사회공헌 활동을 등한시할 수 없다는 시대적 요청도 중요한 배경으로 풀이된다.

서울 강남 포스코센터 로비(아트리움)는 매월 한 차례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포스코는 1999년부터 이곳 로비에서 클래식, 전통음악, 뮤지컬, 대중가요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선보여 왔다. 회사 관계자는 “포스코는 포스코센터 음악회뿐 아니라 캠퍼스음악회, 지역축제 후원 등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 지원을 통해 ‘철’의 딱딱함을 벗고 부드럽고 따뜻한 문화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메세나대상 수상 기업인 현대중공업은 본사 소재지인 공업도시 울산을 ‘문화의 요람’으로 가꿔나가고 있다.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문화예술관만 해도 7개나 된다. 특히 공연 전용관인 현대예술관은 서울 예술의 전당과 맞먹는 시설 수준을 자랑한다. 이들 시설은 시민들에게 개방돼 공연, 전시, 강습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메세나 활동은 주로 사회공헌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홍보팀 조용수 차장은 “36년 동안 울산에 터를 잡아온 향토기업으로서 시민들에게도 공평하게 문화혜택을 제공하자는 취지로 메세나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추세는 메세나가 사회공헌 활동의 수단에서 기업의 마케팅 도구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메세나 활동은 문화예술 지원을 마케팅에 접목했다고 해서 ‘문화마케팅’이라고 부른다. 메세나의 원형이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기부 혹은 지원이라면, 문화마케팅은 기업이 후원에 따른 보상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전략적 메세나 기획·실행은 아직 걸음마 단계

독서경영으로 유명한 우림건설의 직원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맨위)
르노삼성자동차 나눔축제(가운데)
LG화학이 군부대를 방문해 개최하는‘뮤지컬 홀리데이’(맨아래)
독서경영으로 유명한 우림건설의 직원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맨위)
르노삼성자동차 나눔축제(가운데)
LG화학이 군부대를 방문해 개최하는'뮤지컬 홀리데이'(맨아래)

국내 기업들에게 문화마케팅은 아직 초창기 단계다. 하지만 몇몇 기업은 문화마케팅으로 기업 이미지 및 가치 제고에 상당한 성과를 얻은 것으로 평가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품격의 브랜드 이미지를 심기 위해 일관된 문화마케팅을 실천해온 르노삼성자동차를 들 수 있다. 해외 시장에서 다양한 메세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브랜드 가치를 크게 제고한 LG전자도 문화마케팅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메세나든, 문화마케팅이든 성숙기에 도달하려면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남들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의 모방주의로는 기업 이미지 제고나 브랜드 차별화 등의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전경련의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일반인들의 만족도는 고작 2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업들의 사회공헌 활동이 그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뒤집어 말하면 사회공헌 활동을 전략적으로 기획, 실행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게 시급하다는 것이다.

기업문화 컨설팅업체 인터컬처 남정숙 대표는 “문화마케팅은 기업문화나 정체성, 철학을 바탕으로 한 메시지 전달이 가장 중요하다”며 “즉 어떤 기업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고객이 알아챌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미덕인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를 도와주더라도 생색을 내면 순수성이 퇴색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기업의 메세나 활동에서만큼은 정답이 아닌 듯하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