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금호아시아나·SK 등 대기업들 경쟁적 전시 공간 마련고객엔 문화체험·사원엔 문화적 감성 전달 일석이조

‘이제 대기업 빌딩 사무실에 올라 가려면 갤러리를 먼저 거쳐 가야만 한다!’

갤러리들이 도심 속 빌딩 안으로도 들어오는 최신 트렌드는 대기업들이 적극 이끌고 있다. 대형 빌딩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 대기업이 자체 사옥 내에 갤러리 공간을 마련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어서다. 크라운-해태제과가 지난 해 말 사옥 1층에 갤러리를 개관한 것을 비롯, 배상면주가, 코리아나 화장품 등도 전시공간을 별도로 마련하는 등 대형 기업들이 최근 갤러리 유치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는 모양새다.

서울 잠원동 한국야쿠르트 빌딩에 위치한 갤러리 우덕은 사옥 내 들어선 대표적인 갤러리로 꼽힌다. 윤덕병 회장의 호인 ‘우덕’에서 갤러리명을 따서 1997년 개관, 지난 해 10주년을 맞이했을 만큼 벌써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지금은 100여점 이상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어엿한 갤러리로 자리잡았다.

설립 당시만 해도 오피스 빌딩 안에 갤러리가 있다는 것은 보기 드문 사례. 더욱이 강남권 지역에 비영리로 운영되는 갤러리가 개관한다는 것 또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정관에 쓰여진 개관 목적은 ‘일반 대중들에게 문화 예술에 대한 향유와 폭넓은 시각적 자각에 기여한다’는 것.

정관에서처럼 갤러리 우덕은 일반 관람객들에게 예술적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문화 복지를 실현하는 개방적 공간 역할을 꾀하고 있다. 매년 15~17회의 다양한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매달 수백 명이 관람할 만큼 인지도도 높다. 임직원들을 물론, 지역 주민과 전시 기사를 본 독자들이 관람객들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

특히 갤러리 우덕은 실험적인 미술 작업을 반영하는 작품들을 위주로 참신하고 깊이 있는 전시를 많이 기획한다는 평을 얻고 있다. 중견 작가도 적극 지원하지만 전시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는 젊은 신인작가들을 발굴 육성하는 데도 또한 중점을 둔다.

빌딩 내 갤러리가 들어서면서 야쿠르트가 거두는 효과도 만만치 않다. 강남권 미술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해 나가면서 메세나 활동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높여 나가고 있다는 것은 당장의 결실이다. 이장성 홍보팀장은 “ 빌딩의 인지도가 상승하는데다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의 장을 열어 준다는 점에서 기업 호감도가 좋아지는 것도 과외의 소득이다”고 말한다.

제과전문그룹 크라운-해태제과(회장 윤영달)는 지난 해 말 서울 남영동 본사 사옥에 갤러리 ‘쿠오리아’를 개관했다. 1층 로비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입구만 보면 자그마해 보이지만 지하 1층, 1층, 2층의 총 3개층에 걸쳐 마련된 전시관들을 합치면 제법 규모가 크다.

크라운-해태제과가 기업 사옥 내 갤러리 운영에 나선 것은 한 마디로 고객과 감성 및 신뢰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다. 전시관에 전시된 작품을 통해 고객에게는 문화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사원들에게는 문화적 감성을 전달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고 있다.

고객들의 꿈과 상상력을 키워주는 ‘문화기업’의 기치를 내세우는 만큼 전시 내용도 주력 생산 제품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어린이 고객을 위한 각종 체험전시회와 워크샵 등을 주로 운영하는 가운데 7월부터는 체험전 ‘과자나라 앨리스전’을 진행중이다. ‘미술을 먹어버린 과자의 즐거운 상상’ 이라는 체험전 부제에 맞게 과자라는 소재가 미술적 요소로 새롭게 태어나 어린이 고객들에게 다가가는 이색 체험전 성격.

어린이들은 평소에 즐겨먹던 과자라는 재료에 자신만의 재미있는 상상을 결합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들을 만지고, 보고, 듣고 냄새를 맡아보는 경험을 통해 잠재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도록 기획됐다. 쿠오리아의 모든 전시회 관람은 무료로 진행된다.

(주)배상면주가(대표 배영호)도 지난 7월부터 양재동 본사 1층 전통 술문화 갤러리 산사원을 예술인들을 위한 갤러리 장소로 무료로 개방했다. 신제품 론칭 파티와 전통술의 교육 장소였던 곳이지만 본격적인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 하는 셈이다.

산사원은 공개 전시회를 하고 싶어도 경제적인 여건이 안 되는 예술가나 동호인들을 위해 이용된다. 670m²(200여평)규모의 갤러리는 화가, 사진작가, 문학인, 음악인이나 기존 회원까지 공개전시를 원하는 이들은 누구에게나 개방된다.

배영호 (주)배상면주가 대표는 “그동안 작품을 그려놓고도 전시를 못해왔던 문화 예술인들에게 창작 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방문객들에게도 다양한 전시 관람을 즐기면서 우리 술과 문화에 대한 소통의 장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한다.

근래에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화장품 회사들의 갤러리 공간 마련도 돋보인다. 문화 경영을 미래 핵심 키워드로 삼은 ㈜코리아나 화장품(대표이사 사장 유학수)은 2005년 서울 서초동 사옥 내부 리뉴얼 공사를 하면서 1층 로비를 아예 갤러리로 꾸몄다.

(차례대로) 금호아트갤러리, 아트센터 나비, 인핀니티 전시장, 코리아나, 양재 갤러리 산사원

처음 오는 방문객들이 빌딩 입구에 들어서면 ‘제대로 찾아 왔나 싶어 두리번거리게 된다’는 것이 공통된 반응. 로비를 가득 채운 이우환, 천경자, 천경자, 김창렬, 오 윤 등 한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주요 작가들의 판화 작품을 보면 화장품 회사가 아니라 마치 갤러리에 온 것 같은 느낌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기업 입장에서는 로비에 자사 제품을 디스플레이 하거나 유명 작가의 대형 작품 1~2점을 걸어 놓는 구색 맞추기에 머물기 쉬운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코리아나 화장품 로비는 기업 특색에 맞춰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성격을 달리 한다.

특히 인근 주민들이 더욱 반가워하고 있다는 후문. 괜찮은 갤러리가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인근 주민들은 “이름만 들어오던 세계적 작가의 좋은 작품을 모아 놓은 곳이 가까이에 있었구나” 감탄한다.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는 코리아나 갤러리(?)로 소문나 있을 정도라는 얘기도 들린다. 3개월 단위로 새로운 주제에 따라 작품을 계속 교체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또한 한강로에 위치한 본사 사옥 전체를 갤러리화 했다. 2005년 리노베이션을 거쳐 사옥 1층을 접견위주의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살아 숨쉬는 미술관 분위기로 변신시켰다. 주기적으로 작품 교체작업을 통해 다양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운영하는데 거대한 콤팩트 조형물인 노상균의 ‘I love you’와 함께 대표작으로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와 백남준의 ‘절정의 꽃동산’등이 전시되어 있다.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들의 사옥내 갤러리도 이미 문화예술 활동 지원의 일환으로 자리잡고 있는 추세다. 1995년 포스코센터 서관2층에 전시실 158평(522㎡) 규모로 개관한 포스코갤러리는 미술관의 다양한 기능과 역할 중 특히 전시와 교육활동에 치중한다.

포스코미술관은 테헤란로변에서 찾아 보기 힘든 갤러리 전시 공간으로 연간 8~12회 정도 현대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소개하는 전시 활동을 하고 있다. 소장하고 있는 작품 수는 총 638점으로 지난 해까지 기록한 전시횟수만도 116회, 다녀간 관람객 수 만도 1만6,000여명이 넘는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2년 서울 광화문 사옥에 금호아트갤러리를 열고 서울 광화문의 새로운 문화명소로 키워가고 있다. 쾌적하고 품격있는 미술작품 감상을 위해 현대적 전시 환경과 시설로 단장했다는 것이 자체 평가.

또한 금호아트홀과 함께 자리하고 있어 클래식 음악과 미술작품 감상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문화시설로서도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음악-미술-공연을 아우르는 다양한 총체적 기획 프로그램들이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널리 사랑 받고 있는 것. 수준 높은 전시기획전과 초대전을 비롯, 개인전시 등 다양한 작가들에게 새로운 창작활동과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 남대문 삼성 본관 옆에 자리한 로댕갤러리도 빼놓을 수 없다. 1999년 개관한 로댕갤러리는 1995년 삼성이 미국의 저명한 건축가 그룹 KPF에 설계를 의뢰, 만 3년 만에 완공된 독립 빌딩으로 고유의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

로댕의 작품 ‘성당(La cathedrale’에서 모티브를 얻어 그 형태를 차용한 글래스파빌리온(상설전시실)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야외조각장과 같은 채광 효과를 유도하고 높은 천장(10m)과 넓은 내부공간은 전시작품이 여유롭게 설치되도록 배려한다. 이처럼 로댕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미술관은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며 또한 이곳에 상설 전시되는 ‘깔레의 시민’은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로댕의 역작이다.

로댕 작품만 전시하는 세계 8번째의 갤러리인 이 갤러리는 일반인이 로댕의 진품 명작을 도심에서 손쉽게 접근,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열린 공간 역할을 담당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총 500여 평의 공간에 상설전시실(글래스 파빌리온), 특별전시를 위한 2개의 기획전시실, 비디오실, 사무실 등으로 구성, 로댕에 관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서울 도심에 오아시스와 같은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현재는 내부 사정으로 휴관중이다.

서울 종로1가에 우뚝 솟아 있는 SK빌딩 4층에 있는 아트센터 나비도 도심 대형 사옥 내에 자리한 갤러리에 속한다. 1984년 설립된 워커힐 미술관을 전신으로 멀티 미디어 아트 전문기관으로 탈바꿈, 2000년 재개관했다.

지난 7월 열린 ‘환경 미디어 아트전’ 등 예술 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 과학 등 다양한 학제간의 접근을 시도하는 창작 및 전시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빌딩 속 갤러리들과는 차별화된다.

일본계 자동차 회사인 닛산 인피니티의 서울 청담동 전시장 또한 갤러리 겸 문화공간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자동차도 보고 예술품도 감상한다’는 것이 이 빌딩의 모토. 2층에 별도 갤러리가 있긴 하지만 빌딩 전체를 마치 갤러리 전시장처럼 설계하고 꾸며 놓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로서 인피니티가 역동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컨셉을 전달할 수 있도록 개발한 ‘인피니티 전시장 환경 디자인 계획’의 일환이기도 하다.

때문에 전시회가 열리는 날 이 빌딩을 찾는 고객들은 자동차와 예술품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한홍일 사진전’ ‘김중만의 난 사진전’ ‘호주 애버리지널 아트 유화 전시회’등이 그간 열린 예술 전시 행사들. 자동차 출시와 때맞춰 별도의 예술 사진전도 개최하는 등 닛산은 새로운 형태의 문화 마케팅을 선보이며 신선하다는 찬사도 받고 있다.

이처럼 대기업 사옥내 갤러리들이 늘어나면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주변 직장인들의 문화 공간, 소모임의 모임 장소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크라운-해태제과 소성수 홍보팀장은 “빌딩내 갤러리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주변 직장인들의 산책공간, 지역 주민들의 소모임 공간 등 부담 없는 모임장소로 애용되고 있다”며 “기업이 고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공간으로 재창조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는 실력있는 작가들을 위한 창작지원의 열린 공간으로 제공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미지의 시대! 예술을 활용해 기업경쟁력을 갖추려는 기업들의 활동은 다채롭기만 하다. 때문에 문화행사 지원이나 단체 후원 등을 넘어 기업의 주력제품이나 전문화된 분야, 추구하는 기업이미지에 부합하는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갤러리를 사옥내에 운영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새롭다기 보다는 여전히 진행형에 가깝다.


박원식 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