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스토리와 캐릭터… 영화·드라마·뮤지컬로 재탄생

바야흐로 만화의 시대가 왔다.

10년 전만 해도 만화는 어린 학생들이나 보는 가벼운 오락에 다름없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어린이보다 성인들이 만화를 더 열심히 보고 애니메이션 시장이 영화 시장보다 더 크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웃 나라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만화가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그 자체의 작품성을 인정받기보다는 대개 하나의 실험에 그치고 말았다.

지난 1980년대 <신의 아들>(1986, 박봉성 원작), <지옥의 링>(1987, 이현세 원작), <카멜레온의 시>(1988, 허영만 원작) 등이 잇따라 영화로 제작됐지만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실패 사례로 남았다.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공포의 외인구단>(1986, 이현세 원작)은 당시 다른 영화들과 달리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만화 원작을 가공하는 과정의 정교함보다는 정수라가 부른 OST의 힘에 기인한 바가 컸다. 이는 어디까지나 만화라는 콘텐츠의 가치를 낮게 보는 인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쌓인 노하우는 서서히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영화 <비트>(1997, 허영만 원작)는 만화 원작 영화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낸 첫 사례가 되었다.

이후 평범한 일상사와 최루성 멜로의 양극에서 무한반복하던 영화와 드라마는 극적 스토리를 만화에서 찾으면서 더 풍성한 내용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덕분에 관객과 시청자들은 기존의 판에 박힌 캐릭터와 스토리라인 대신 참신하고 매력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접하게 되었다.

■ 문화콘텐츠 시장을 점유한 만화 열기

만화의 가치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식자들이 21세기를 문화콘텐츠의 시대라고 공언한 시기와 맞물린다. 참신한 스토리와 아이디어 고갈로 고민하던 기존의 영화와 드라마, 공연계가 만화에서 해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칭찬 같기도 하고 조롱 같기도 했던 ‘만화적 상상력’이라는 표현은 이제 완전한 찬사의 뉘앙스로 쓰이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히트를 친 드라마의 계보를 보면 만화 원작 드라마들의 위력을 알 수 있다.

드라마 ‘폐인’ 양산을 넘어 한류 열풍에도 일조한 <다모>(2003, 방학기 원작)와 <풀하우스>(2004, 원수연 원작), 기존의 성 역할을 바꾼 부부의 일상을 코믹하게 그린 <불량주부>(2005, 강희우 원작), 입헌군주제 사회에서의 소녀 판타지를 그린 <궁>(2006, 박소희 원작) 등은 만화 특유의 상상력이 브라운관에서도 효과적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캐릭터와 연출은 이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의 호응 덕에 이제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CG와 와이어 액션이 난무하고 다소 부자연스러운 장면도 등장하지만 오히려 시청자들은 그런 점을 즐기게 됐다.

퓨전사극을 표방한 <쾌도 홍길동>은 기존의 사극 화법과 의상을 무시하고 현대식으로 편하게(?) 전개됐지만 시청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는 데 성공했다. 만화 <바람의 나라>의 표절의혹을 받았던 <태왕사신기>는 과연 만화를 능가하는 CG 기술로 판타지 역사극으로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물론 만화 원작 작품들이 모두 기발한 상상력에만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트>의 성공으로 만화의 원소스 멀티유즈(OSMU, One Source Multi Use) 성공시대를 연 허영만 화백의 <식객>과 <타짜>는 원작의 치밀한 심리 묘사와 전문인의 극적 세계가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탄탄한 스토리 안에 녹여내며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영화에 이어 드라마로도 성공했던 <식객>이 종영한 후 뒤를 이어 <타짜>도 방영을 시작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작의 각색은 타 장르의 관객들을 꾸준히 잡아두기 위해 필수적인 부분이다. 드라마 <타짜>는 주인공 고니 외에도 원작에 없는 ‘영민’을 등장시켜 고니의 라이벌로 부각시켰다. 또 정마담의 비중을 줄이고, 대신 고니의 첫사랑인 ‘난숙’을 주요 인물로 향상시켰다. 이미 잘 알려진 만화 원작 자체로는 높아진 시청자의 눈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총 제작비 200억 원이 투입된 판타지 사극 <바람의 나라>(김진 원작)는 이미 뮤지컬을 통해 이름을 알린 기대작이다.

드라마 <하얀거탑>이 테마곡을 차용해 더욱 유명해진 이 작품 역시 캐릭터별 각색을 통해 드라마만의 매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바람의 나라>는 첫 방송부터 15%에 가까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아울러 내년에는 80년대 최고의 국민 만화였던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MBC에서 <2009 외인구단>으로 드라마화할 예정이어서 원작 팬들을 들뜨게 하고 있다.

인터넷 만화가로 유명한 강풀의 ‘순정만화’와 ‘바보’ 등은 네티즌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데 힘입어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인터넷에서 무대 위로 옮겨진 두 만화-연극은 전국 주요 도시에서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바보’는 영화로 만들어져 다시 한 번 원작의 감동을 선사했고 ‘순정만화’는 현재 촬영 중에 있다.

20대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를 개와 고양이를 의인화한 캐릭터로 표현한 만화 ‘위대한 캣츠비’(강도하 원작)는 뮤지컬로 옮겨진 사례. 대한민국 만화대상 대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현재 국내뿐 아니라 미국·영국·프랑스·스페인 등에서도 단행본으로 출판되며 한류의 가능성을 내비쳤었다. 80∼90년대 인기를 끈 ‘달려라 하니’(이진주 원작)와 ‘영심이’(배금택 원작)도 뮤지컬로 만들어져 20~30대 팬들을 동심으로 이끌었다.

1. 영화 '식객'의 한 장면
2. 영화 '타짜'의 성공은 드라마 '타짜'의 제작을 가능케했다
3. 뮤지컬 '바람의 나라'
4. 브라운관에서 다시 펼쳐지는 드라마 '바람의 나라'

■ 양질의 콘텐츠 생산 위한 창작 지원 필요

이처럼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로의 각색은 한동안 계속해서 인기를 끌 예정이다. 원작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점 때문에 원작의 팬들을 그대로 관객층으로 흡수할 수 있다. 특히 원작이 대작인 경우 캐스팅의 문제만 해결되면 흥행이나 질적 수준면에서 어느 정도의 안전성을 담보하기에 위험 부담이 적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 재창조된 작품이 원작보다 못하다는 입소문이 돌면, 높아진 기대치가 오히려 두 배의 실망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만화 캐릭터와 각색된 작품의 등장인물은 원작 팬들에겐 비교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진행 내내 연출자와 연기자가 가지는 부담감은 끝날 때까지 따라다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출자나 감독에게 만화는 여전히 도전해보고 싶은 매력적인 소스다.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요즈음, 일반 대중을 넘어 연출자 자신도 감탄하면서 읽은 만화는 새로운 작품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원석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 <괴물>로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올라선 봉준호 감독은 일본의 인기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의 영화화에 관심이 있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에 비해 아직 원소스 멀티유즈의 인프라가 열악한 우리나라는 여전히 문화콘텐츠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헤쳐나가야 할 장애가 적지 않아 보인다.

물론 최근 우리나라 문화콘텐츠 산업이 국내 경제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급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활용되는 장르에 비해 활용할 수 있는 원작 만화콘텐츠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한 원작 만화가 타 장르에서 재창조에 성공하면 해당 원작을 가지고 다시 다른 장르에서 각색하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현실은 관계자들의 시선을 해외로 돌리게 해 최근 해외저작물의 국내 판권 계약이 많아지는 결과를 빚고 있다. 당장 내년 하반기에는 일본 와인만화 <신의 물방울>이 드라마로 제작되어 한국의 안방을 찾게 된다.

원작자가 주인공 캐릭터의 모델로 삼았던 한류 스타 배용준이 실제 등장한다는 소문은 이미 한국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원소스 멀티유즈’라는 이름 아래 만화의 가치가 올라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씨를 뿌리고 가꾸는 과정 없이 과일만 따내서는 언젠가는 빈 나무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작금의 상황에서 관계자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멀티유즈’가 아니라 ‘소스’를 어떻게 키우는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1차 소스인 만화의 창작 과정에 대한 포괄적 지원과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문화콘텐츠 산업을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결국 막대한 금액을 들여 해외 작품 판권을 사오면서 외화를 낭비하는 현재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 만화에 대한 ‘가벼운’ 인식도 바뀌어져야 한다. 여전히 개선되고 있지 않은 출판만화 시장에 대한 열악한 대우와 함께, 구조를 더욱 악화시키는 불법 스캔과 인터넷에서의 유통도 만화 시장을 살릴 수 있는 대안이 된다.

세계적으로 만화는 ‘망가’로 더 유명하지만 인터넷 강국인 한국의 만화도 점차 위력을 넓히고 있다. 이미 만화로부터 ‘멀티유즈’된 드라마나 영화가 세계에 수출돼 한류 열풍을 이어가는 현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문화산업이 새로운 활로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경제불황 상황에서 좋은 소식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소스’인 만화에 대한 관심이 없이는 이 같은 현상을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이미 다양한 문화콘텐츠의 뿌리가 된 만화산업에 충분히 영양분을 공급해주지 않는다면 의외로 호황은 금방 끝날 수 있다. 이 모든 성공의 시작인 1차 저작물의 주인인 창작가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함께 다양한 지원과 관심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원소스 멀티유즈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