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으로서 한글 가능성 무한"

‘포트폴리오’. 조금 떨어져서 읽으면 포트폴리오란 글자가 매직아이처럼 떠오른다.

가까이 들여다 보면 자음과 모음이 각각 담긴 네모난 공간 속에 색색의 물고기도 있고 굽이치는 물결도 있다. 전각을 설치미술, 전각판화, 퍼포먼스, 레이저 빔, 애니메이션으로까지 확장시킨 ‘혁명적’ 예술가 고암 정병례 씨의 작품이 망라된 포트폴리오의 표지로, 그것은 또 하나의 예술이었다.

그의 작품은 지하철 역사마다 붙어있는 서화액자 ‘풍경소리’를 비롯해 책 표지, 상업광고, 기업CI 등을 통해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지난해 반기문 유엔 총장의 ‘삼족오 직인’을 새긴 장본인으로 대중에 널리 알려졌다. 그에게서 ‘문화적 컨텐츠로서의 한글’의 가치와 한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글의 디자인적 측면이 부각되고 있는데, 한글이 가진 예술적 가치를 어떻게 보시나요?

한글은 기하학적이고 완벽한 글자로 한자의 상형성과는 많이 달라요. 우주 질서의 부호 같은 느낌이 강하지요. 그러면서도 미니멀 하고 모던한 느낌이 있어 디자인으로서의 한글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전각에 다양한 한글 서체를 새겨오셨습니다.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한자보다 한글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져야 하지요. 과거의 한글이 언어로서 위대한 창조물이었다면, 이 시대 예술가에겐 개인의 조형언어라는 창작의 과제가 주어집니다. 그릇이 바뀔 뿐 안에 담는 물은 그대로 에요. ‘포트폴리오’라는 글자가 전체로 보면 글씨이지만 하나씩 보면 예쁜 디자인으로 보이는 것처럼요.

갤러리이자 작업실의 이름을 새김아트라고 칭하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새기다’ 라는 말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마음에 새기다’, ‘글씨를 새기다’처럼 물질과 정신을 포용하고 범주가 없어요. 내가 글을 쓸 때마다 ‘새김’으로 마무리 짓곤 했는데, 어느 날 무릎을 딱 쳤어요. 내가 하는 일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전각하면 서예에서 파생됐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새김아트에선 그런 개념도 없어지는 겁니다. 이름을 통해서 자유를 얻은 거죠.

예술성에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해외에 진출하지 않으신 이유라면…?

25년 전부터 해외에 전각 예술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혼자서는 아주 힘이 들어요. 정부지원을 받으려고 디자인협회 가입도 해보려 했지만 매출, 직원 수 등 자격 조건이 아주 까다롭죠. 학맥이나 학파가 없어 다른 통로도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열심히 하는 것뿐이죠. 하지만 구조가 개인의 퀄리티를 검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문화 컨텐츠는 소멸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쓰다. 한글의 디자인적 가능성을 확장시킨 국내 대표적 예술가 중 한 명이지만 그는 정작 문화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고군분투해온 덕에 내년쯤엔 해외진출의 길이 열릴 것 같단다. 최근 한국적인 문화, 특히 한글의 문화적 가치에 힘을 싣고 있는 정부의 세심한 ‘살핌’이 필요한 때다.

■고암 정병례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1992), 대한민국서예대전 우수상(1992), 동아미술제 특선(1993) 등을 수상했다. 대한민국서예대전, 서울서예대전 등의 초대작가, 여러 공모전의 심사위원, 단원미술제 운영위원 역임 등 폭넓은 활동을 해왔다. 작품으로는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 영화 ‘娼 -노는 계집 창’ ‘오세암’, MBC 베이징 올림픽 타이틀,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 책 표지 등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겸임교수로 있다.


이인선 객원기자 Sun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