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ㆍ사회학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의 역사는 사회주의보다 훨씬 앞선다. 어쩌면 인류가 태동하면서 권력이든, 부(富)든 자본주의적 생리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존재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부자와 빈곤한 자라는 단어로 규정됐지 않았나 싶다.

짧은 지식이지만,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자본주의를 학문적ㆍ이론적으로 정립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져만 갔고, 마르크스는 마침내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타개하기 위해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했다. 물론 사회주의는 절대적 평등이라는 명제에 함몰되면서 본질이 바뀌어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남보다 더 잘 살고 싶다’는 의욕을 감퇴시키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았다.

필자가 이런 장광설을 늘어놓은 까닭은,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성공욕망’에 대한 의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때문이다. 수십 년 전 우리는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외친 적이 있다. 정부가 주도한 이 구호 속에는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기는 했지만,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지금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도 어쩌면 이런 성공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요즘 무기력증이 팽배해 있다는 느낌이다. 한 글자라도 더 알기 위해 시간을 쪼개가면서 밤늦도록 공부하는 학생은 사라졌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잘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수도 많이 줄었다. 대신 “공부를 안 해도 잘 살 수 있다” “열심히 일 안 해도 돈 많이 번다”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하나의 지식이라도 더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선생님은 줄었고, 1원이라도 더 벌어 회사를 살찌우겠다고 생각하는 사장님도 직원도 찾기 힘들어졌다.

반면 단체의 힘을 빌려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골몰하는 사람은 늘어나고, 나보다 공부를 더 잘하거나 돈을 더 잘 버는 사람들을 매도하고 힐난하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남을 흠집내기 위한 음모의 ‘잔머리’는 고도화되고, 옆 사람을 궤멸시키기 위한 싸움의 기술은 더욱 세련되고 있다.

세상이 이러니 부자와 가난한 자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갈 수밖에 없으리라. 아마도 이런 상태라면 조만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지나 않을지 걱정된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의 정치ㆍ사회 구조상 국민들의 분열과 반목을 치유하고 해소하는 데 정부만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시민단체나 정당이 국민들의 생각을 통합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런 조직 역시 자기의 이해만 앞세우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국민화합’에 모든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현 정부가 출범 7개월 동안 국민들로부터 비난받은 큰 이유 중 하나가 ‘부자 정부’라는 것이었다. 만약 정부가 그러한 비난처럼 정책을 취하거나 행동하게 되면 부자와 가난한 자의 거리를 더욱 멀게 만들고, 끝내는 국가를 병들게 할 것이다.

모든 정책의 기본에는 ‘배분적 평등’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깔아야 하고, 개인들의 성공욕망을 자극하는 쪽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것은 시민단체나 정당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유리하고, 내 주머니가 살찌는 쪽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면 결국은 자신이 가진 것조차 모두 잃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싫다고 무조건 미국을 반대하거나, 내가 싫다고 무조건 부자를 미워하거나, 내가 싫다고 무조건 다른 종교를 배척하거나, 내가 싫다고 무조건 동족을 외면하거나, 내가 싫다고 대통령을 욕하거나, 내가 싫다고 무조건 전직 대통령을 깎아 내리는 몰지각한 소아병은 하루빨리 버려야 할 것이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