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다 도시 경쟁력이 화두인 시대 인간 중심 도시설계로 승부수시각적 요소에 문화, 역사등비시각적 요소 더해야 도시 정체성 확보 가능

신이 자연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혼융(混融)되어 역사와 문화가 창출되는 공간이다. 도시 속에는 오랜 세월 동안 정교화된 질서 혹은 체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도시의 외피와 정신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이다.

역사 이래로 수많은 도시가 명멸했고 지금도 많은 도시가 새로 생겨나거나 사라지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도시도 생로병사의 생명을 가진 유기체적 존재라는 점이다.

도시의 생명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 사느냐에 따라 도시의 크기와 활력, 미래가 결정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생존조건 역시 도시에 크게 좌우된다. 인간은 환경과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적 삶에서 도시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전 세계가 도시화(都市化)하는 지구적 현상 앞에서 인간은 도시를 선택할 수는 있어도, 도시 밖으로 나가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도시인의 존재양식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형국에서 인간의 삶은 도시에 의해 메말라 가거나 혹은 풍성해지거나 둘 중의 하나다. 회색 콘크리트와 공장, 자동차 매연으로 가득찬 삭막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시들어갈 것이고, 자연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윤택해질 것이다. 다만 도시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사람들 손에 쥐어져 있다는 점은 중요한 대목이다.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이 성숙해가고 있는 오늘날, 더 이상 도시는 국가(혹은 중앙정부)에 의존할 수 없게 됐다. 도시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도시 경쟁력’이라는 화두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배경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도시 경쟁력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고 있다. 한 도시의 힘이 나라의 힘을 좌우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천지개벽과 같은 도시개발을 통해 ‘중동의 별’로 떠오른 아랍에미리트연방 도시국가 두바이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두바이가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한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창조적인 ‘도시 디자인’(Urban Design)에 있다. 세계 최고층 빌딩, 인공섬, 사막 위의 스키장 등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관광 인프라가 두바이를 가장 빛나는 21세기 도시의 반열로 끌어올린 것이다.

두바이는 왜 도시 디자인이 최근 세계적인 핫이슈로 떠올랐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하나의 사례다. 즉, 도시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대에 각 도시가 핵심 승부수로 던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도시 디자인이라는 점이다.

도시 디자인의 부상에는 몇 가지 다른 이유도 있다. 우선 1980~1990년대 이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많은 도시들이 성장 한계에 부닥쳐 침체되거나 노후화하면서 도시 재개발 혹은 도시 재생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됐다는 점이다. 가까운 예로 서울을 비롯한 우리나라 대도시에서 일상화된 재개발 사업을 들 수 있다. 짙은 쇠락기에 접어들던 스페인의 작은 공업도시 빌바오는 이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립한 이후 문화관광도시의 명성을 얻게 된 경우다.

또한 신흥시장 국가들이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편입되면서 이들 나라에 신도시가 대거 건설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도시 디자인의 급부상 배경으로 지적된다. 새로운 도시 건설 수요가 커짐에 따라 그만큼 도시 디자인 수요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최근 고속성장을 거듭해온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이나 90년대 이후 국내 신도시 개발 역사에서 쉽게 발견된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6개 회원국 30개 주요 도시들을 대상으로 경쟁력을 평가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 결과에 따르면 국내 1, 2대 도시인 서울과 부산은 3개 그룹으로 분류된 등급에서 가장 낮은 ‘전환기의 도시’에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전환기의 도시’란 기존의 도시정책을 고수한다면 쇠퇴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으로 평가된 도시들이다. 말이 좋아 전환기의 도시이지 실제로는 ‘위기의 도시’들인 셈이다. 독일 베를린, 캐나다 몬트리올, 이탈리아 나폴리 등 세계 유명 도시들도 이 그룹에 포함됐다.

반면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일본 도쿄, 독일 뮌헨, 미국 뉴욕 등은 가장 높은 등급의 ‘월드스타 도시’로 분류됐다. 이들 도시는 막강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다국적기업의 근거지 및 국제 지식산업의 중심지로 군림하고 있다.

물론 OECD가 도시 디자인을 핵심 평가기준으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서울 부산 등 국내 대도시가 월드스타 도시에 비해 도시 디자인이 많이 뒤떨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점으로 보더라도 국내 도시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선진적인 도시 디자인 도입이 시급해 보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서울과 부산, 대구 등 대도시들이 국제 수준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상당히 의욕적인 도시 디자인 전략을 시정(市政)에 접목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도시 디자인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최근 부각되는 도시 디자인의 핵심철학은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을 띤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과거 산업시대의 도시 디자인이 물량과 효율성, 경제성을 중시한 반면 요즘 도시 디자인은 쾌적한 환경, 매력적인 경관, 문화적 요소 등 인간 중심의 삶의 질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적인 도시 디자인 전문가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건축도시계획대학 미하일 트립 교수는 지(한국도시설계학회 발행)와의 대담에서 “인간 중심의 도시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실마리는 인간이 실제 공간 경험에서 얻는 도시의 이미지”라며 “어떻게 그 이미지, 즉 도시환경의 분위기를 계획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욕구를 만족시킬 시각적 디자인을 하느냐 하는 것이 주요과제”라고 강조한 바 있다.

트립 교수의 말처럼 도시 디자인은 도시 이미지를 창출하는 핵심 도구이지만, 단지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즉, 그 도시의 고유한 문화나 역사 등 비(非)시각적 요소들도 도시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큰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국내의 많은 도시들이 새로 시도하는 도시 디자인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그저 다른 도시의 잘된 디자인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도시 고유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충분히 성찰한 결과를 토대로 한 디자인이 훌륭한 도시 디자인이라는 점이다.

바야흐로 디자인의 시대, 도시도 자신만의 개성으로 가득찬 매력적인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할 때가 다가왔다. 그것은 한 번쯤 부려보는 호사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되고 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