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1952년생. 아버지는 외교관. 보우도인대 경제학사(74년) 평화봉사단원(카메룰에서 74-76년) 국무부(77년). 주한 대사관 경제담당 엽사(83-85년) 마케도니아 대사(96-97). 교소보 조사단 부대표(98-99), 폴란드 대사(2000-4년) 한국대사(2004-5). 동아태차관보(2005-현재)>는 9월2일 하오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돌아왔다.

1일 평양으로 갈 때 평소 웃는 얼굴의 그는 “비장감이 느껴졌다”고 그를 잘아는 이들은 말했다.

다시 돌아온 판문점에서 비장감을 없어 졌지만 슬픈 표정보다 기쁨이 보였다.

무엇 보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이 여전함을 실감 할수 있었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이번 세번째 평양 방문인 그는 김위원장을 이번에도 만나지 못 했지만 그를 초청한 3년여 동안 그와 6자회담에서 만난 김계관 부상을 통해 그의 근황을 들을수 있었다.

그는 서울-평양 왕복길에 2007년 12월4일에서 1주일여 동안 평양에서의 일들을 회상 했을 것이다.

그에게 김정일, 북한, 핵을 둘러싸고 미국,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6자와 가진 만남에서 제일 기억 나는 것은 무엇일까?

대답이 될는지 모르겠다. 9월9일자 ‘어제와 오늘’에 소개한 마이크 치노이가 8월5일에 낸<멜트다운(Melt Down-녹아내림)-북한 핵 위기의 내막>에서 그 해답을 찾아본다.

마이크 치노이는 CNN의 베이징, 동아시아 지국장, 94년 카러와 김일성의 만남을 취재한 특파원으로 북한을 열네차례나 찾아 취재 했다. 2006년에 CNN을 떠나 현재 켈리포니아 대학 석좌교수다.

그는 힐과의 여러 차례의 만남, 인터뷰, 수백명의 관계자들을 추적해 책 제목을 ‘녹아 내림’으로 한 이유를 405쪽에 쓰고 있다.

그는 적어도 1994년 이후 발생한 북한의 핵 보유를 둘러싼 국내.국외의 강경 보수파와 중도 포용파의 긴 대결의 장벽을 멜트다운시킨 첫번째 인물이 크리스스토퍼 힐도 보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요약 하고 있다.

<<(2007년 12월4일)의 평양은 몹시 추웠다. 외국 정상들이 묵는 백화원에 여상은 푼 힐 일행(성김 국무부 한국관장,우리김 보좌관)은 김계관 부상에게 ‘친얘하는 위원장’으로 시작 되는 부시의 친서를 전하기위해 그와의 면담을 요구 했다.

김 부상의 답은 ‘위원장은 지방순시중이다”는 것이었다.

힐은 편지의 내용을 모르는 북한이 혹시 원본이 아닌 것을 갖고 왔다고 의심하고 힐이 차관보 급임을 감안 한것이기 때문이다고 생각 했다.

그는 이튿날 박의춘 외상에게 정중하게 편지를 전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유리 김이 번역한 정중한 편지는 ‘친얘하는 위원장 님”께로 시작 됐다.

편지에는 “만약 김 위원장이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불능화 한다면 국교를 가질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백악관은 강경 보수파를 우려해 같은날에 편지중 두줄만 발표 했다. “핵폐기 서명(북한의)은 완벽하고 정확해야만 앞으로 두 나라는진전을 향해 갈것임을 강조 합니다.”

북한은 편지에 대해 기뻐 했고 조선, 중앙통신은 두 줄을 보도 했다. 다만 부시앞에 붙은 “깡패며 덜 떨어진 망나니”라는 접두어 대신 ‘부시 대통령’이라고 했다.>>

치오이는 힐이 이 편지의 부시싸인을 얻기위해 노력하고 진력한 것을 ‘친얘하는 지도자’라는 장(章)에 22쪽이나 썼다.

치노이는 북핵 문제의 해결에 노력한 세사람의 미국인을 들었다. 첫번째가 94년6월15일 김일성을 만난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두번째가 2000년 10월 김 위원장을 만난 마드린느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그리고 네오븐, 강경우파의 벽을 녹아내린 크로스토퍼 힐 이다.

치노이는 그의 능력은 “세상은 안되는 것도 있지만 되는게 더 많다”는 열정으로 “싸움 하지 않고 대화로, 외교로 푸는 부지럼 함”에 있다고 분석 했다.

힐은 부시으 ㅣ편지를 전한후 김 부상과 2007년 12월30일 까지 북한의 영변핵 시설을 불능화 하는 것에 대해 3일여동안 협의 했다.

힐은 질척 거리려는 김 부상에게 말했다. “유명한 미술가는 미완성 작품으로도 큰돈을 번다. 그러나 외교관은 마무리 안된 일로는 어떤 것을 팔수 없다.”

그는 불능화 성명, 그 표단계에서 질척 거리는 오늘을 앞질러 내다 보고 김 부상에게 경고 한 것이다.”

김 부상은 2007년 2월13일에 핵 지하실험(2006년 10월)후 북한의 핵 폐기를 성명한후 평양에 돌아와 김 위원장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 최고의 층만 사는 ‘은혜 거리’로 집을 옮겼다. 김 위원장은 그에게 벤츠차를 새로 줬다.

힐은 미국의 강경파가 엄존 하는한 “정확하고 깨끗한 마무리가 없는 불능화, 이에 대한 검증이 없을 때 여지것 열정은 무산 됨”을 여러 번 그에게 환기 시켰다.

치노이는 결론 내리고 있다.

<<힐은 2007년 12월 김계관과 협의를 마친 후 영변 핵 연구소에 일행과 함께가 현장을 둘러 봤다. 차거운 밖에서 미국과 두 나라를 적대케 한 핵체가 건물을 봤다.

벤츠로 평양으로 돌아 가면서 어둠속을 유령처럼 스쳐가는 수레, 자전거, 사람들의 음영을 보면서 상명에 쌓였다.…

북한은 봉쇄 속에서, 공산권의 몰락속에서도 견뎌 냈다. 그 과정속에 건국의 아버지를 잃었고 엄청난 기근을 겪었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북한 시민들이 희생되었으며 북한 자체 정부도 손상을 않었고 ,미국 정부의 선의도 무시되었다. 만약 최종 해결책이 서로 보장 서명된다면 그것이 계속 이루어 지도록 노력 해야한다.>>

크리스토프 힐은 그 방안의 실행자인 김정일 위원장의 현재를 보러 평양에 갔다.

다시 김 위원장에게 마이클 치노이의 ‘멜트다운’을 읽기를 권한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