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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증 보고서… '빨리빨리' 문화, 약인가 독인가
고성장 원동력·정보화 경쟁력… 성수대교 붕괴등 '사고 공화국' 오명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 부실공사가 낳은 참사, 성수대교 사고
2- 경찰에서도 화상회의는 보편화되어 있다
3- 유비쿼터스 정신을 구현하는 디지털 강국 한국의 면모
한국인의 특성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는 ‘빨리빨리’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배우는 단어들 가운데 ‘빨리빨리’가 꼭 끼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이 말을 얼마나 자주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제까지 ‘빨리빨리’는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여왔다.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주문하고 금방 나오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행사인 결혼식도 무언가에 쫓기듯 15분 내로 해치우는 광경은 외국인들에겐 낯선 광경이었다.

이 같은 ‘빨리빨리’ 문화는 해방 이후 근대화를 목표로 한 빠른 경제 성장에 국민의 라이프스타일이 맞춰진 채 오늘날까지 고착화된 까닭이 크다. 목표 달성과 함께 얻어지는 경제 성장의 대외적 지표는 어느덧 ‘근면성실한 한국인’이라는 브랜드를 갖게 했고 ‘빨리빨리’는 하나의 미덕으로조차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와 순서가 있는 법.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해야 하는 일도 재빨리 해내야 인정받는 한국적 풍토는 부작용도 여러 차례 일으켜왔다.

이른바 ‘사고 공화국’의 오명을 썼던 90년대의 성수대교 사고와 삼풍백화점 사고는 ‘빨리빨리’ 문화가 부실 공사로 이어진 대표적인 예다. 가까이는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사건도 있다. 빠른 시간 내에 일정한 성과만 거두면 된다는 성과만능주의의 어두운 이면이다.

■ 현 시대 '빨리빨리' 문화의 양면성

그런데 최근 인터넷 시대의 산업화와 관련해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화 통화보다도 문자 메시지가 익숙한 ‘엄지족’은 이제 10대 문화를 대변하는 트렌드가 됐다.

은행 서비스도 은행에 직접 갈 필요 없이 길을 걸으면서 휴대폰으로 인터넷 뱅킹 서비스에 접속해 즉시 해치운다. 멀리 있는 사람과의 화상 통화나 회의도 이제 한국에서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21세기의 ‘빨리빨리’ 문화는 이제 고쳐야 할 단점이 아니라 세계적 경쟁력으로 추앙되고 있다. PC 통신부터 양방향성 소통에 대한 폭발적인 잠재력을 분출해온 한국인은 급변하는 신기술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변용해냈다.

그 결과 한국은 제반 IT 인프라가 고루 발달해 세계 최고의 인터넷 강국으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제프리 존스 전 주한미상공회의소 회장은 ‘IT 강국 한국’의 배경을 한국인의 급한 성질에서 찾기도 한다.

정보화 시대의 경쟁력은 곧 속도이고 이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한국인의 ‘빨리빨리ism’은 그런 점에서 디지털 환경과 궁합이 잘 맞는 셈이다.

하지만 디지털과 결합된 ‘빨리빨리’ 문화에도 어김없이 후유증은 뒤따르고 있다. 속도가 생명인 디지털 환경에 길들여질수록 조급증이 심화되는 것이다. 기존의 비디오 플레이어보다 간편해진 DVD나 인터넷 영화는 조금의 지루함도 용납되지 않는다. ‘스킵 신공(빨리감기)’이 있기 때문이다.

메신저의 등장 이후 이메일은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메일을 보낸 후 상대방의 답을 기다리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휴대폰 문자 메시지 소통은 그러한 조급증의 극단을 보여준다. 상대방의 수신 여부를 알 수 없기에 응답이 올 때까지 계속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화현상으로서의 조급증은 또 다른 심리적 증상으로 파생되기에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다. ‘버퍼링 증후군’은 일이 더디게 진행되면 불안해서 안절부절하는 증상이다.

4분의 1을 뜻하는 쿼터(Quarter)에서 유래한 ‘쿼터리즘’은 사람들이 디지털 환경에 익숙해져 무엇이든 15분 이상 집중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최근 등장한 ‘퀵 백(Quick Back)’이라는 신조어는 디지털 조급증을 한 마디로 집약했다. 자신의 특정 행동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보고 싶어 하는 행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 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의 김원 교수는 “조급증이 하나의 병명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항상 바쁘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는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대신 김 교수는 "조급한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빠르게 돌아가는 주변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목표를 세워 실천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 가속도의 시대, 다운시프팅의 철학 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빨리빨리’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여겨지는 한국에서 조급증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지난 2월 전소된 국보1호 숭례문의 복원 기간을 놓고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2∼3년 안의 빠른 복원’을 언급해 여론의 질타를 받은 바 있다. 사안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성찰보다는 그것을 ‘최대한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만연함을 또 한 번 증명한 것이다.

속도가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는 우리도 그 속도경쟁에 참여하라고 끊임없이 권유한다. ‘패스트 푸드’와 ‘패스트 패션’은 그러한 속도경쟁이 낳은 산업화의 산물이다. 확실히 오늘날 한국이 선진 강국 대열에 올라선 것은 이 속도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앞선 까닭이 크다. ‘빨리빨리’ 문화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력은 훌륭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회는 쉽게 지치고 각박해진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사람들의 삶에는 여유가 없다. 조급증의 이면에는 현재에 대한 불안감이 담겨 있다. ‘빠름’을 요구하는 사회에 몸이 제동을 거는 것이다.

2000년 발간된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그해 서점가를 강타했다. 전 세계가 공히 속도전을 벌이는 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주장이었지만 사람들의 ‘느리게 살기(Downshifting)’에의 숨겨진 동경이 드러난 단적인 예였다.

흔히 알려진 대로 다운시프팅은 ‘빨리빨리’와 반대로 무조건 ‘느리게’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빨리 진행되는 사회문화의 지배적 흐름에 맞서 자기만의 속도를 찾자는 것이다.

한국인은 이제까지 ‘선진 한국’이라는 쳇바퀴에서 쉴 새 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그것은 가끔씩 감당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삶을 즐기고 싶은 이들은 속도를 줄이라’는 쌍소의 처방은 여전히 효과적이다.

‘빨리빨리’ 문화가 약도 되고 독도 되는 시대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우리가 자신만의 삶의 속도를 찾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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