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 희생된 부적응자의 무기력한 삶과 희망… 덤덤한 필치로 희망의 단서 제시'오늘을 잡아라' 솔 벨로 지음/ 양현미 옮김/ 민음사 발행/ 8,000원

나를 구하려면 기적이라도 일어나야 할 것이다. 내 돈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나를 해체시킬 것도 없겠지. 그런데 왜 내가 걸려들었지? 온 세상의 바닷물이 나에게로 밀려오고 있다.”

주인공 토미 윌헬름은 무직자다. 가족에게서도 버림받아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뉴욕의 한 호텔에서 빈들대며 살아가는 40대 중반 남자다. 남들의 눈을 의식하며 건강한 삶을 보내는 듯 보이기를 바라지만 그의 인생은 누가봐도 실패자다.

허무하고 무력하며 번번이 무참하게 깨질 뿐이다. 늘 그랬듯 주인공은 아침 잠에서 깨어 아버지와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끝까지 버틸 수 없으리라는 것은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삶에 대한 절망이 급기야 공포 수준에까지 이른다. 식당에서 아버지와 또 한바탕 다툰 뒤 과거의 실패와 불안감에 사로잡혀 극심한 좌절을 앓는 토미 앞에 정신과 의사 탬킨 박사가 나타난다. 토미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탬킨 박사는 ‘오늘을 잡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토미 역시 탬킨 박사의 충고에 매료되면서 희망을 따르고 싶지만 이미 추락할대로 추락한 현실 어디에서부터 출발점을 찾아야 할 지조차 막막하다. 재정적인 곤경에 처한 토미에게 탬킨 박사는 주식 투자로 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도움을 자청한다.

토미는 그에게 전 재산을 투자하지만 마지막 디딤돌이었던 탬킨 박사마저 그후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더 깊은 절망과 황망함 속에서 토미는 박사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 그러다 우연히 장례행렬에 끼어들게 되고, 자신과는 전연 상관없는 생면부지의 시신 앞에서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며 울부짖기 시작한다.

저자 솔 벨로는 물질문명이라는 가차없는 톱니바퀴 속에 끼어 좌절하는 낙오자들의 삶을 토미의 이름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은 토미가 단 하룻동안 겪은 또다른 ‘일장춘몽’이다.

심성은 착하지만 번번이 실수하고 방황하는 사회 부적응자들의 현실을 통해 ‘약아야 살아남는다’라는 현대사회의 정글법칙을 쓰라릴만큼 냉혹하게 짚고 있다. ‘희망’이라는 존재에까지 잠복할 수 있는 환상의 허를 지적한다.

저자는 희망의 존재를 역설하고 싶었던 듯 하다. 그가 택한 결말이 특히 흥미롭다. 낯선 장례행렬 속에 터져나온 토미의 오열은 저자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바를 그제서야 방점으로 찍어 노출시킨다.

무릇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인간이라는 개인사 역시 자신 그리고 과거와의 진정한 청산과 화해없이 희망의 새 순이 돋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현실이라도 이에 대한 편안한 ’장례’와 ‘배웅’ 후에야 비로소 현실과도 악수를 나눌 수 있다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솔 벨로는 197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오늘을 잡아라>에서도 특유의 담담하고 건조한 문체, 내면적인 독백과 시점의 변화, 삽입 어구 등의 장치 등이 돋보인다. 화법은 삭막하지만, 삶에 대한 저자의 깊은 성찰과 철학을 조용하고도 강력하게 들려준다. 고전적인 하드보일드 문학을 좋아하는 세대에게 복고적인 문체의 맛을 새삼 되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저자는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20세기 미국 문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리웠던 세계 문학계의 거목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에도 그가 주목했던 현실의 엄혹한 냉기와 인간 내면의 허무에 여전히 공감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한편 서글프다. 문명의 낙오자들과 이들의 외로운 좌절기는 언제까지 무한반복 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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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