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인생의 피냄새나는 삶… 여자와 죽음은 '숙명' 인가

미국은 분명 자본주의 사회다. 그래서 조직 범죄까지 상품화한다.

상품화한 범죄는 느와르영화를 탄생시켰다. 느와르는 미국의 지하경제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문화사 교과서다. <대부>와 <스카페이스>는 미국의 이민사를 다시 기록하게 하였으며, 금주령시대에 밀주 유통과 마약 제조와 지하 자본 축적 과정을 써내려간 영화 문화사다.

느와르는 배경 없고 좋은 가문도 아닌 삼류인생을 강요받은 인간군상들이 어떻게 몸으로 때우면서 생존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악행을 무기로 빵을 구하고 안정된 가정 대신 밤무대의 댄서나 거리의 여자와 짧고 불길한 연애를 하면서 지뢰밭같은 밤거리에 유숙한다. 그들이 보여준 삶의 아슬아슬함과 목숨을 내던진 생활은 깊은 연민의 근원이다.

한국의 느와르는 사회 문화적 맥락이 삭제되고 생계형 조직폭력배의 성장과 몰락이 중심에 자리한다. 장현수의 <게임의 법칙>과 <걸어서 하늘까지>처럼 시골 상경한 건달과 도시 변두리 출신의 소매치기가 등장하여 생계를 위해 조직원이 되고 조직을 위해 헌신하다가 결국 배신당한다.

조직원으로 입문부터 타고난 싸움에 대한 감각으로 중간 보스로 급성장 하다 이내 보스의 소모품이 되어 거세되는 상승과 추락의 급경사를 오르내린다. 서사의 중심은 사회적 타자의 조직폭력에 입문에서 조직에 의해 일회용으로 용도 폐기되는 과정이다.

대표적인 생계형 느와르는 송능한의 <넘버 ?3>이며 주인공은 양복입고 업소 관리하는 직업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 역시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게 된 조직폭력배의 삶을 통해 자녀를 유학 보내고 홀로 남은 수많은 기러기 아빠들의 심정적 지지를 얻어냈다.

김해곤의 <숙명>은 생존을 위해 친구를 배신한 조직폭력배의 험한 운명의 지도를 펼쳐보인다.

김해곤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연출한 감독이며 <라이방>과 <파이란>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작가인 일인 다역의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수많은 재주를 구비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탁월한 재능은 한국사회 타자들의 정서와 언어를 프레임에 채우는 능력일 것이다.

그가 작업에 참여한 시나리오는 주로 변두리의 남루한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회적 타자들을 주인공이며 사용하는 언어의 8할은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설과 비속어로 점철된다.

<숙명> 역시 조직폭력배가 등장하여 욕설과 비속어를 마음껏 발산하고 언어 폭력의 전시장이다. 아마 이 영화는 국립국어원에서 근무하는 국어학자와 한글학회 회원들이 가장 불편하게 본 올해의 한국영화로 지목될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이 쏟는 비속어는 그들의 운명과 삶을 어두운 뒷골목으로 내몰아버리고,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싸움판에 던져버리고, 그들의 사전에서 행복이라는 낱말을 지워버린 알 수 없는 운명과 사회에 대한 유일한 항의표시이다.

<숙명>은 동생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 모든 악행을 자행하는 철중(권상우 분)과 친구들을 위해 감옥행을 택하고 ‘모범적으로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우민(송승헌 분)이 주인공이다.

두 인물은 폭력 세계에서 만나서 어긋난 운명으로 죽고 죽이는 진흙탕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의 서사에 휴식시간 같은 짧은 연애를 집어넣었다. 철중은 친구를 배신하고 조직의 이인자가 되어 악행으로 종횡무진한다. 하지만 그는 여동생이 표상하는 가족의 행복에 집착한다. 철중은 이혼하고 싶어하는 여동생을 설득하여 가정생활의 유지를 강요한다.

그는 행복이 화목한 가정과 풍요로운 부에 있다고 단답형으로 생각한다. 이 소박한 행복 이데올로기는 가족과 부라는 두 개의 가치를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을 허용하게 한다. 그의 악행은 동생의 행복과 자본의 획득이라는 대의 앞에 모든 명분과 알리바이를 제공받게 된다.

철중의 친구이자 그에게 배신당한 우민은 감옥에서 모범적으로 살다 출소하여 모범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는 있지만 어머니와 소통 실패, 친구의 약물중독, 조직의 보스에게 묶여있는 애인, 친구의 살해위협 등이 그의 삶을 조여온다.

애인 은영(박한별 분)은 우민에게 “난 한사람만 쳐다보는 그런 여자 아니야”라고 선언한다. 은영은 한국느와르에서 보기 드문 캐릭터를 보여준다.

느와르에 등장하는 여성은 대부분 남성의 성공을 방해하거나 성공의 증거와 동기를 부여하는 요부의 자리에 서 있다.

느와르 주인공은 생과 사의 울타리를 넘나면서 지친 심신의 피로를 여성의 사랑과 애무를 통해 위로 받고 싶어한다. 여성은 거친 남성의 휴게실이면서 모성애라는 담요를 덮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동시에 여성으로 인해 남자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게 되는 위험성도 지닌다. 하지만 은영은 생존을 위해서 원하지 않는 남자와 동거를 결정하는 강단과 감정처리 미숙으로 인해 자신과 우민이 받을 상처를 미리 예견하고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현명함까지 갖추고 있다. 강단과 현명함은 그녀가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아왔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아직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후회의 눈물을 흘릴 나이이지만 그녀는 이미 지나치게 많은 인생의 역정을 이미 겪어버린 것이다. 삶의 고통과 버거움은 불행의 함정으로 밀어 넣기도 하지만 강인한 삶의 맷집을 길러주어 강철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연단의 과정이기도 하다.

은영의 냉정한 거절과 친구의 거듭된 발작에도 우민은 윤리적으로 살아가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윤리적으로 살아가기에는 서있는 골목이 너무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긍정하게 된다.

그는 어두운 시장의 골목을 뛰어다니고 유흥가에서 비싼 통행료를 치루며 드나들고 쇠파이프와 칼로 공격당하는 일들이 숙명이라고 스스로 결론내린다.

그리고 목숨을 판돈처럼 내던지고 도박같은 세계에 뛰어든다. 그 비장함은 가족과 친구와 여자로부터 배제된 우민의 상황과 도덕을 버리고 성실하게 조직을 이끌어온 철중의 좌절이 서로 충돌하면서 밀도를 더해간다.

그리고 느와르답게 윤리의 세계에서 폭력의 세계로 진입한 이들은 죽음으로 응징된다. 느와르는 의리를 위해서든 조직을 위해서든 악행을 자행한 주인공들은 반드시 목숨을 지불해야한다. 이 장르의 룰은 기업화한 조직범죄를 영화상품화한 미국과 생계형 조직폭력배가 주류인 한국 영화에서 어길 수없는 불문율임을 확인해 준다.

■ 문학산 약력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현 세종대 강사, 영등위 영화등급 소위원, 한국영화학회 이사.저서 <10인의 한국영화 감독>, <예술영화는 없다><한국 단편영화의 이해>. 영화 <타임캡슐 : 서울 2006 가을>, <유학, 결혼 그러므로 섹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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