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명소 그대로 옮겨놓은 듯 생생

‘길의 작가’이영희 화백이 이번엔 북녘의 산과 들, 공기를 남녘에 풀어놓았다. 서울 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북녘의 땅-고향 찾아가는 길>展이다. ‘길’ 연작으로 유명한 이 화백이 5년에 걸친 작업 끝에 내놓은 대규모 전시다. 직접 평양과 향산, 금강산, 대동강 등 북한의 주요 명소를 다니며 그려온 신작 40여점이 관람객들을 만나고 있다.

작품들이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여운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별 잔재주를 부림없이 북녘의 길에서 본 그대로를 화폭으로 옮겼다. 자연에 가까운 색채와 섬세한 묘사로 풍경과 인물 등 대상을 사실감있게 담았다.

전혀 미화하거나 과장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맨 눈으로 함께 그 풍경 안에 들어선 듯 느끼게 한다. 특히 개울 가의 수초들과 길 섶의 풀더미, 관목 등은 극세필붓까지 동원한 정밀한 묘사가 빛난다.

높은 하늘과 대지 사이를 가르고 지나는 길은 인간의 삶과 여정을 표현, 리얼리티로 섬세하게 표현된 근경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반추한다. 풍부한 색감, 그러나 전반적으로 평화로움이 감도는 구성 또한 편안하다.

‘신의주 가는 길’에는 하늘과 허허벌판이 화면 전체를 양분한다. 그 가운데 멀찍이 작은 점 하나처럼 길을 걸어가는 한 촌부의 뒷모습이 조용히 자리하고, 그 몇걸음 앞질러 개 한 마리 종종거린다.

‘새마을운동’이 있기 전 우리의 50,60년대 거리 풍경같기도 하다. 오른쪽 하늘을 덮은 한 떼의 구름 외에는 땅과 하늘 거의 모든 곳이 텅 비어있다. 잡초 무성한 황폐한 땅에 누군가 말없이 걸음을 옮길 뿐. 외로울 법도 하지만, 묘하게도 우울하거나 칙칙해보이지 않는다. 그저 작가 옆에 나란히 서서 원시 시골의 한 풍경을 물끄러미 구경하는 기분이 들 뿐이다.

‘삶의 길 - 백두산 가는 길목’또한 눈길을 끈다. 수레나 자동차 바퀴 자국이 선명한, 비 온 뒤의 질퍽한 흙탕물 길의 묘사며 논둑길의 진 땅, 움푹 패인 자리에 고인 물, 장식처럼 뒤덮인 가장자리의 풀더미 빛깔까지 선명하다. 사진을 찍은 것처럼 또렷하고 세밀하다. 그러면서도 안온하다. 평화롭다. 마치 스스로 방금 전 지나쳐 온 뒷 길을 되돌아보듯 풋풋하고 소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물화인‘北의 여인’은 그림의 대상지가 북녘 땅임을 은근히 일깨워준다. 인물의 국적을 제목에 밝히지 않았다해도 어딘가 생소함을 느낄 수 있을만큼 북한 여성 특유의 분위기를 세밀하게 포착, 표현해냈다. 아주 근소하디 근소한 어떤 차이를 작가는 어떻게 보았고, 이를 어떻게 자신의 붓에까지 입혔을까.

이 화백의 이번 작품들이 반가운 또한가지 이유는 북녘이 우리 민족의 한 고향이기도 하지만, 선진국형 공해에 찌든 남녘 한국의 오늘과는 달리 아직 문명의 횡포가 휩쓸지 않은 미개발지를 볼 때 갖게 되는 순수함에 대한 미련과 향수 때문이다. 마천루와 자동차로 빽빽한 남녘의 대도시에서 느끼는 질식감에서 잠시나마 해방된다. 여백이 풍성한 풍경 속에서 비로소 인간과 자연의 체취를 맡는다.

작가는 이번 그림들을 통해 북녘 땅과 주민들의 빈한한 삶을 넌지시 보여주며 또다른 메시지를 남기기도 한다. 전시는 10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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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