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파리 길거리 공연 성황 힘입어… 이정주 앙상블조직 거문고 세계화 앞장

프랑스 파리에서는 몇 년 전부터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아니, 유럽 대륙에서 우리 악기가 사랑 받고 있다고? ‘글쎄’라며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바로 거문고리스트(Geomungolist) 이정주씨의 이야기다.

거문고를 연주하는 여자 이정주. 그녀는 이정주 앙상블을 조직, 거문고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정주 앙상블은 거문고를 기본으로 터키의 전통악기 사즈(Saz), 클래식 기타, 남미 악기의 최고봉 퍼커션과 클라리넷으로 구성된 다국적 연주 팀. 악기는 물론, 연주자들도 영국 호주 등 다양한 국적으로 이뤄진 다문화 집합체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수년 째 활동중인 이정주 앙상블은 국적에 관계없이 동서양이 혼재된 문화권의 악기를 통해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는 음악을 창조한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다양한 국가와 민족의 악기가 융합된 새로운 차원의 소리와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유럽 음악계에서도 주목 받고 있는 것. 무엇 보다 우리 악기인 거문고의 존재와 소리를 알리고 있는 주요 ‘매체’이기도 하다.

그녀는 왜 거문고를 들고 유럽으로 향했을까? 지금 ‘이정주와 거문고’는 유럽에서는 제법 관심을 끌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그만큼 주목을 받고 있진 못하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지난 날 국악기인 거문고를 가지고 먼 대륙으로 향한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우리의 거문고 소리가 프랑스인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 일으킬 것인가 궁금했습니다.” 그녀가 거문고 하나를 달랑 들고 파리로 향한 것은 2003년. 판소리와 전통 무용으로 한 팀을 결성, 겁도 없이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첫 무대는 ‘길 거리’.

“누가 생전 처음 보는 악기와 음악에 무대를 내 주겠습니까? 당장 거리에서부터 도전해 보기로 맘 먹었죠.” 파리 경시청에서 거리 공연 허가를 받아 퐁피두 광장에서 첫 공연을 벌였다. 그런데 반응은 의외. 순식간에 300~400여명이 모여 들면서 즉석 공연장이 성황을 이룬 것.

이들 ‘거리의 청중’들은 예상 외로 거문고 소리와 국악 공연에 귀를 기울이며 즐거워했다. “아! 거문고 소리가 이들에게 ‘먹히는 구나’ 하고 자신감을 얻게 됐습니다.” 그녀는 “당시 거리에서부터 반응이 없으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오히려 정반대였다”고 지금도 스스로를 대견해 한다.

거문고의 성공을 확신한 그녀가 이후 택한 선택 역시 같은 길. 프랑스 12개 도시를 돌면서 길거리 투어 공연을 벌였다. 그러기를 1년여. 마침내 2004년 프랑스 파리의 극장으로 들어가 객석을 앞에 두고 거문고 연주를 할 수 있었다. “거문고가 서양 악기와도 접목될 수 있고 또 세계화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연주회에는 ‘앙상블’이란 이름이 말해 주듯 다른 외국의 악기가 항상 같이 연주된다. 국적과 민족을 초월한 음악의 화합과 새로운 소리의 창조인 것. 하지만 공연의 절반은 거문고 독주로 진행된다. 둘 다 거문고를 해외에 더 알리는 의도에서 세계화를 겨냥한 포석에서다.

한국의 전통 악기나 국악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음악인을 찾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거문고로는 이정주가 유럽에서는 사실상 처음인 셈이다. “일본의 3줄짜리 현악기인 샤미생은 미국이나 캐나다 등의 악기점에서 쉽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거문고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녀는 “중국이나 일본 음악이 머리로 듣는다면 우리 음악은 서양인들에게 가슴으로 와 닿게 하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그녀가 결심한 것은 ‘거문고로 전세계를 여행하겠다’는 것. 거문고를 전파해 세계 어떤 장소에서도 거문고가 보이게 하고, 또 거문고를 통해 우리나라도 알릴 수 있겠다는 포부에서다. “국악인도 자각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세계화에 나서야죠!”

최근 유럽에서 일고 있는 전통ㆍ민족 음악 붐도 그녀의 활동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지난 30~40여년간 유럽에서 퓨전 음악이 꽃을 피웠다면 몇 년 전부터는 복고풍의 음악이 되돌아 오고 있다는 것. 바로크풍의 음악이 재연되고 그 시대의 악기 연주자가 다시 등장하며 당시 곡들이 유행하고 있는 것 등도 그런 추세를 반영하는 증거들이다. 외국 악기인 거문고의 입지도 그만큼 넓어지는 셈이다.

특히 다른 나라 음악이나 문화의 흡수력이 강한 프랑스의 역사적 전통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이끌었다. “유럽의 예술인들이 모인다는 프랑스에서 통할 수 있으면 유럽에서도 통할 수 있기 때문에 파리를 택했습니다.” 일례로 중국에서는 지금 잘 안되지만 프랑스에서는 경극이 인기를 끌고 있고 또 ‘진정한 샤미생 연주를 들으려면 일본이 아닌 파리를 가라’는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프랑스 사람들이 거문고 소리를 무척 좋아합니다. 억양이 너무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프랑스 사람들도 ‘사운드가 일치한다’고 놀라곤 하죠.” ‘프랑스 사람들의 대화가 거문고 소리처럼도 들린다’는 그녀는 거문고 소리가 불어를 닮았다고 단언한다. 또 프랑스 사람들이 동적인 음악 보다는 정적인 음악을 선호하는데 상대적으로 사물놀이나 ‘난타’류 보다는 여유있는 거문고 소리가 ‘먹힌다’는 해석이다.

프랑스에서는 신문과 방송에 적잖이 등장하며 ‘유명인사’로도 데뷔한 그녀의 유럽행은 하지만 처음부터 즐거운 출발은 아니었다. 한 마디로 국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떠밀리다시피 떠난 것. “제가 국내 국악 무대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됐습니다. 그래서 ‘좁은 국토’를 떠나 ‘넓은 세계’로 나아가 봐야겠다고 맘먹게 되었지요.”

광주예고 시절 최연소로 합격한 전남도립국악관현악단에서 10년 활동하고 중요무형문화재 이수자 자격도 획득한 그녀는 예상외로 음대 국악과 출신이 아니다.

이력서에 쓰이는 학력은 광주대 무역학과 졸.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야간대학을 가야 했는데 당시 광주 야간대학 중에 국악과가 없어 그냥 대학을 골라 간 때문이다. “왜 아픈 얘기를 물어 보세요?” 그녀는 “지금 거문고를 수출하고 있으니 전공을 살리고 있는 것은 맞다”며 웃는다.

이후 그녀는 음악 공부도 하고 ‘가장 중요하다’는 인맥을 얻으려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광주서 올라와 얼마나 버티나 보자’ ‘아직도 안 내려갔네.’ ‘저런 공연도 하네’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돈도, 줄도 없는 그녀는 결국 6년 여만에 포기하게 됐다. “한정된 자리를 놓고 국내에서만 서로 ‘치고 받고’ 다툴 것이 아니라 해외 넓은 무대로 나아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 “이제는 떠날 때가 됐다”고 그녀는 당시를 기억한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절반씩 활동해 온 그녀는 앞으로는 프랑스 무대에 ‘올 인’하기로 다시 맘먹었다. 활동 무대를 유럽과 미주로 옮겨 본격적인 승부를 보겠다는 도전에서다. 벌써 7월 캐나다 퀘벡 페스티벌, 8월 프랑스 르 파빌리온 페스티벌, 10월 프랑스 파리와 투우 현악기 페스티벌 등에서 초청받는 등 당장 소화해야 할 일정만으로도 바쁘다.

여성적이라는 가야금에 비해 깊으면서도 무거운 소리를 내는 거문고의 음색은 다채롭다. 굵은 줄과 가는 줄이 섞여 4계절과 희로애락,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표현해 낸다는 것은 거문고 만의 매력. “내가 할 수 있는 거문고를 가지고 즐거운 일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즐겁습니다.” 그녀는 6월20, 21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프랑스의 유명 뮤지션 세바스찬 막델과 함께 거문고 공연을 벌인다. 23, 24일에는 EBS TV 프로그램 공감에도 출연 예정.


글·사진 박원식기자 parky@hk.co.kr